농사를 짓던 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계절은 봄이었을 것이다. 씨를 뿌리는 시기를 잘못 계산하면 한 해 농사를 망치게 되고 그러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굶어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어로 ‘계절’을 뜻하는 ‘season’과 ‘씨를 뿌리다’는 뜻의 ‘sow’, ‘씨’라는 뜻의 ‘seed’가 모두 어원이 같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자로 계절을 뜻하는 ‘계’(季)가 볍씨를 형상화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러나 봄이 중요했던 것은 농사 짓기 훨씬 이전부터였다. 수렵과 채취로 먹고 살던 인간들에게 춥고 긴 겨울이 지나고 꽁꽁 얼어붙어 있던 땅에서 새싹이 솟아 올라오는 것보다 더 신비롭고 감동적인 사건은 없었을 것이다. 영어로 봄이 ‘솟아오르다’는 뜻을 가진 ‘spring’인 것도, 한자로 봄 ‘춘’(春)이 새싹이 땅을 뚫고 올라오는 것을 형상화한 것도 그래서다.
고대 게르만족은 4월을 ‘오스타마노드’라 부르고 ‘봄의 여신 ‘에오스트레’를 숭배하는 축제를 열었다. 에오스트레는 ‘봄의 여신’이면서 ‘새벽의 여신’이며 ‘빛의 여신’이기도 하다. 영어로 동쪽을 뜻하는 ‘east’도 여기서 왔다.
빛과 새벽, 봄과 동쪽은 무관한 것 같지만 사실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새벽은 동쪽에서부터 밝아오고 빛의 세력이 어둠의 세력보다 커지는 시점이 봄의 시작인 춘분이기 때문이다.
봄은 또 부활의 상징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죽었던 것처럼 보이던 땅과 헐벗은 나뭇가지에서 파릇파릇 새싹이 돋는 모습보다 죽음을 이기고 피어나는 생명을 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오늘 솟아나는 새싹은 개체적 관점에서는 작년에 진 나뭇잎과 다르지만 생명 나무의 관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작년 땅에 떨어져 묻힌 낙엽의 양분을 먹고 태어난 것이 올해의 새싹인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각자가 보기에는 자신이 가장 중요하고 독특한 존재인 것 같지만 크게 보면 인류의 일부다. 그리고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의 유전자는 99.9%가 같다. 32억개에 달하는 인간 DNA 짝이 이 정도 일치를 보인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로는 설명되지 않고 공통의 조상이 있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아담과 이브는 가설이 아니라 사실인 것이다.
현대 생물학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공통의 조상을 갖고 있다고 본다. 이 조상의 이름은 ‘마지막 보편 공통 조상’(Last Universal Common Ancestor)이다. 과학자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모든 생명체가 DNA와 RNA라는 유전 정보 체계를 갖고 있고 ATP 기제를 통해 에너지를 보관하고 사용하기 때문이다. 모든 생물이 이처럼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단백질 구조와 서열을 우연의 일치로 똑같이 갖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찰스 다윈은 이미 1859년 ‘종의 기원’에서 모든 생명체가 공통의 조상을 갖고 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과학자들은 LUCA가 태양계 초기 38억에서 41억년 전 소혹성들이 충돌하며 운석들이 비처럼 내리던 ‘후기 대폭격 시대’(Late Heavy Bombardment) 직후 혹은 이전에 출현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생명 출현은 기적이 아니라 필연이라고 봐야 한다. 극한 상황 속에서도 조건만 맞으면 생명은 태어난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오는 20일은 기독교 최대 명절인 부활절이다. 이 날이 게르만 족의 봄 축제였던 ‘Easter’로 불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예수의 부활과 새 생명이 싹트는 봄의 이미지가 잘 맞아 떨어진데다 기독교인들이 게르만족을 포섭하면서 이들의 축제를 함께 포용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유럽 전체에 널리 퍼질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이처럼 유럽의 토착 전통을 과감하게 수용한 것이다. 부활절 다음으로 중요한 성탄절도 원래는 로마인들의 축제인 ‘정복되지 않는 태양신’의 생일이자 페르샤의 신 미트라의 생일인 12월 25일 열리는 축제를 성경에 근거가 없음에도 예수의 생일로 차용한 것이다.
이 날짜는 이보다 훨씬 이전부터 중요했다. 춥고 어두운 겨울이 깊어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하던 고대인들에게 언제 다시 태양이 승리할 것인가를 아는 것은 초미의 관심사였을 것이다. 점점 짧아지던 날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와 비슷한 시기에 열리는 축제 이름이 ‘정복되지 않는 태양’인 것은 그래서이다.
이집트 피라미드와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유럽 최대의 석조물인 스톤헨지의 중심축이 동지날 해가 지는 방향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은 고대인들이 이 날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보여준다.
최초의 생명을 제외한 모든 생명의 탄생은 사실 부활이다. 부모의 유전자가 자식의 몸이란 형식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봄은 그 상징이다. 봄이 있는 한 우리는 희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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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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