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지배력을 행사하는 지역에서 싱가포르는 지정학적 카드를 신중하게 활용해가며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한다. 따라서 싱가포르 국방부장관이 최근 미국의 이미지에 관해 내놓은 발언은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다. 그는 “미국이 해방자에서 훼방꾼으로, 렌트를 받으려는 집주인으로 변했다”고 꼬집었다. 싱가포르의 원로정치인 리 셴룽은 세계가 직면한 도전을 언급하며 “미국은 더이상 세계 질서를 뒷받침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지적하고 “이로 인해 국제 환경의 질서와 예측 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졌다”고 평가했다
불과 몇 주사이에 트럼프 행정부는 외교정책의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미국은 30년전 부다페스트 각서에 서명하면서 우크라이나의 안보를 지켜주겠다고 굳게 약속했다. 하지만 현 정부는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싸우는 오랜 민주주의 우방국을 사실상 포기했다. 그러면서도 우크라이나 광물자원의 상당부분을 요구한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를 미국의 지원에 대한 ‘보상’이라고 설명한다.
한편 워싱턴은 이웃이자 가장 가까운 교역상대인 캐나다와 멕시코를 상대로 무역전쟁을 선포했고, 덴마크에게 그린랜드 매각을 요구했으며, 파나마 정부에게는 파나마 운하를 넘기라고 압박했다. 여기에 보태 미국의 도움으로 설립된 세계보건기구(WHO)에서 탈퇴하기로 결정했고 세계의 빈곤국들을 대상으로 한 원조 프로그램마저 대부분 폐기했다. 세계 1차대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미국의 관대한 전통을 단번에 깨버린 셈이다. 트럼프가 선언한 관세는 지난 수 십년에 걸쳐 미국이 만들고 지켜온 무역규칙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다.
이처럼 놀라운 반전은 전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는 지구촌 곳곳에서 외교정책의 혁명을 가져올 것이다. 독일의 차기 총리가 유력시되는 프리드리히 메르츠는 “나의 절대적인 우선순위는 가능한 한 신속히 유럽의 힘을 키워 단계적으로 미국으로부터 진정한 독립을 달성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며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의 발언 이후 미국의 현 행정부가 유럽의 운명에 대체로 무관심하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고 말했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구축한 안보시스템의 중심에 섰다. 이 나라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은 기존 안보제체의 지각변동에 해당한다. 메르츠는 프랑스와 영국이 그들의 핵우산을 독일로 확대하는 아이디어까지 제시했다. 미국이 독일을 지켜주리라는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의 안보 지원 약속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본질이지만 트럼프가 약속을 지킬 것이라 믿는 유럽의 지도자는 단 한명도 없다.
트럼프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에 등 돌리는 모습을 지켜본 대만인들의 심정도 복잡하다. 중국의 영토 침탈야욕을 저지하는데 도움을 주기는커녕 트럼프는 대만이 자체적인 방어에 충분한 예산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대만인들은 우크라이나를 내친 트럼프가 베이징과 거래를 맺고 자신들마저 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미국의 이런 모든 움직임은 커다란 파장을 일으킬 것이다. 첫 번째 효과는 새로운 다극적 세계의 개막이다. 독일과 일본 같은 주요국들은 불가피하게 국가 안보에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이는 일본과 한국이 외부의 공격에 대비한 보험으로 핵무기를 매력적인 옵션으로 꼽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미국의 안보우산 아래에서 지구촌의 핵 확산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극적인 변화가 올 수 있다. 모든 나라들이 너나없이 미국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고려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하는 많은 국가들은 달러화 지배에 대한 대안도 모색할 것이다. 이같은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실체인 유럽은 미국의 국채에 가장 효과적인 경쟁자가 될 EU 채권 발행에 나설 수 있다. 세계의 기축통화국이라는 미국의 ‘어마어마한 특권’은 - 저렴한 비용으로 막대한 적자를 낼 수 있게 해주었지만 -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빨리 손상될 수 있다.
이런 모든 변화는 국제무대에서 미국의 힘과 존재감을 약화시키려는 러시아와 중국에게는 큰 선물이다. 최근 러시아의 한 애널리스트는 트럼프의 우크라이나 정책에 대해 “이것은 성탄절, 하누카, 부활절과 블라디미르 푸틴의 생일이 같은 날에 한데 겹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미국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국제질서를 바꾸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비용과 혜택을 꼼꼼히 따져보았는지 묻고 싶다. 미국이 80여년에 걸쳐 구축한 규칙과 규범 및 가치에 입각한 국제 시스템은 인류 역사상 최장 기간에 걸쳐 강대국 사이의 평화와 세계의 번영을 가져왔다. 미국의 동맹은 전세계에 우리의 영향력을 증폭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이 시스템의 최대 수혜자인 미국은 그로부터 수 십년이 지난 지금도 아젠다를 정하고 경제적으로, 기술적으로 군사적으로 세계를 지배한다. 기존의 국제 시스템이 와해된다면 미국의 특권적인 지위 또한 허물어지면서 세계는 더욱 위험하고 빈곤해질 것이고 미국은 고립되고 신뢰를 잃은 채 불안정해질 것이다.
포스트-아메리카의 세계가 우리의 눈앞에 펼져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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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드 자카리아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 CNN ‘GPS’ 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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