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하게 미국에 오게 됐다. 급하게 여권을 신청하면서 역시 급하게 뗀 영문 졸업증명서 상의 이름을 적어냈다. 그러니까 나의 영어이름은 부모님이 아니고 모교의 학적과에서 지어주신 것이다.
한글 로마자 표기법이 그즈음에 바뀌었나 보다. 정이라는 성을 대개는 Chung이라고 쓰던 시절인데 당시로는 생소한 Jeong이라고 찍혀나왔다. 내 느낌에만 어색한 것도 아니었다. 오자마자 차량국, 은행, 사회보장국 대기줄에서 이름이 불릴 때마다 불편을 거듭했다. 지~엉, 이러면 그나마 나은 거고 고개를 갸우뚱한 채 서류를 봤다가 또 보고 그러면 내 차례.
지금 돌이켜 보면 크게 불만 삼을 건 아닌 성 싶다. 첫째, 어디 출신인지 헷갈리게 함으로써 스테레오타입 선입견을 피할 수 있고 둘째, Chung은 짧게 발음하는 고무래 넷째천간 정(丁)씨에 어울리고 당나귀 나라 정(鄭)은 길게 발음하니 지엉이 더 맞을 법 해서다. 그래도 선택이 나한테 있었다면 Jung이라고 쓰고 융이라고 불러달라고 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이렇게 성은 됐다 치고 이름이 문제다. Jaewook. 관공서나 은행에 갈 때마다 이름을 말하고 그걸 또 철자로 풀고 여러 차례 읨? 윔? 주고받는 밀당을 벌여야 한다. 병원 대기실에서 차트를 들고 나와 양 미간 주름 파며 제이이우크 지엉 하며 애쓰는 간호사들에게도 왠지 미안하고.
그래서 법적이고 공식적인 신원을 확인하지 않는 일상에서는 그냥 제이라고 나를 소개한다. 이선희의 J인지 Jay인지 Jae인지는 그때그때 사람 봐서 대답한다. 학교에서 학생들은 날 미스터 제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가끔 굳이 풀네임 그대로 부르고 싶다는 친구들이 있다. 한국 아이들을 입양해서 친해진 부부가 그랬다. 아내는 그게 어렵지가 않다. Young Joo, 금방 제대로 부른다. 아내 자신도 ‘영’이라 불리기 보다는 ‘영주’ 하고 제대로 불리는 걸 원한다. 하긴 미국에 사는 한국인 이름으로 가장 흔하기로는 ‘영’이 으뜸이라 풀로 쓰는 게 옳은 선택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름에 ‘영’자 들어간 분들은 다들 젊어 좋으시겠다.
입양부부를 앞에 놓고 자, 따라해 보세요. 재욱!
... 제...
다시 재욱!
제...웍?
...
몇 차례 교습 끝에 더는 안 되겠다 싶어 평소 연구해 둔 재욱어원설을 설파했다.
It sounds like JAYWALK!!!
그리곤 비상한 나의 영어실력에 스스로 뻑가서 흐뭇해 했다. 비스듬히 길을 건너는 jaywalk에 내 머리에 떠오른 단어는 횡보(橫步) 염상섭이었다. 시키는 대로 고분히 따르지만은 않겠다... 뚜벅뚜벅 소걸음 우보(牛步), 싸늘하게 획 돌아서 걸어가는 랭보(冷步). 얼마나 문학적이고 낭만적인가!!!
그런데 어째 앞의 학생들로부터 감동의 반향이 돌아오지 않는다. 얼척없다는 그 표정.
나중에 좀더 알고 보니 낭만은 개뿔이요 jaywalk에는 무단횡단, 즉 경범죄의 뜻이 담겨 있어서였다.
이 말은 그리 오래된 게 아니란다. 상공업이 발달하고 도로 닦아 마차, 자동차가 분주히 오가는 대도시가 등장하면서다. 천한 자본이 고상함을 전유하고 도로는 보행자 대신 자동차가 우선이던 시절. 농사나 짓던 시골 촌뜨기들이 서울 구경 왔다가 도시의 법칙을 모른 체 아무데서나 길을 건너다가 차에 치이는 사고가 잦았나 보다.
그래서 생겨난 단어. 빠릿빠릿하지 못하고 둔하고 멍청한 시골뜨기(jay) 걷는(walk) 꼴이라니... 눈흘겨대는, 까질대로 까진 도싯것들이 만들어낸 그 이름, 제이웍.
내 한자 이름의 욱(頊)이 멍할 욱, 그랬으면 됐지 태평양 건너 여기까지 와서도 멍청한 천성은 어찌하지 못하는 게 나의 성명학 운세인가 보다. 그러지 뭐 한 세상 어리버리 살다 가는 거지 뭐.
<
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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