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이 3년 만에 종전의 급물살을 타고 있다. 지난 1월 백악관으로 돌아온 트럼프 대통령이 이 과정을 직접 지휘하고 있다.
영토 포기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온 젤렌스키 대통령은 영토 양보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러시아도 트럼프 행정부가 자국과의 관계 개선 의지를 보이는 것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면서 종전 대화에 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종전 후 우크라이나 안전 보장에 대한 우크라이나•유럽-미국-러시아 간 입장 차이가 커서 현재로서는 언제 어떠한 방식으로 종전 협정이 체결될지는 예측이 어렵다.
한편, 트럼프 미 행정부가 주도하는 이 종전 추진 과정은 냉전 해체 후 유지되어온 기존 국제 질서에 대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그중 트럼프의 새로운 대(對)러시아 인식과 접근은 그 핵심 요소로 부각되고 있다.
2월 12일 3년여간 중단되었던 미러 정상 간의 통화가 있었다. 트럼프는 이날 통화에서 푸틴과 종전 문제 이외에 중동문제, 이란 핵, 에너지, 인공지능(AI), 달러화 문제를 비롯한 관심 주제들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2월 18일 미러 간 고위급 회의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는 종전 방안, 정상회담 준비, 양국 관계 정상화 및 협력 방안 등의 의제가 논의되었다. 그런데 동 회담 중 미국과 러시아가 종전 문제를 넘어 양국 관계 정상화를 포함한 ‘지정학적, 경제적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는 것은 전세계에 적지 않은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미국과 러시아 간 논의된 지정학적 협력 의제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양측이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으나, 에너지, 우주탐사, 북극 사업 등의 양국 간 실질 협력 의제가 논의된 사실은 밝혔다.
이처럼 미국과 러시아가 관계 개선에 대해 긍정적 신호를 주고받는 가운데 2월 24일 우크라이나 전쟁 3주년을 맞아 열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서의 결의안 채택 과정은 새로운 국제 안보 지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미국이 동 전쟁을 ‘분쟁(conflict)’으로 표현하고 ‘조속한 전쟁 종식’을 촉구한 결의안을 제출했는데, ‘러시아의 침공’ 문구 삽입을 주장한 영국과 프랑스는 기권을, 중국과 러시아는 찬성표를 던지며 미국이 낸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즉, 5개 상임이사국 내에서 영-프가 한편에, 미-중-러가 다른 한편에서 서는 형국을 보여준 것이다.
그동안 유엔 안보리는 상임이사 5개국이 미-프-영 대(Vs.) 중-러로 양분되면서 그 기능이 마비되다시피 했다. 그런데 이날 안보리 결의 과정은 미-중-러 간 협력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리더십은 케네디가 러시아와의 데탕트를 시도했던 시기와 냉전 해제 전후 10여 년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러시아를 적대시하는 정책을 펴왔다. 특히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미러 간의 갈등은 2000년 대 중반부터 심화되어왔고 이번 전쟁을 계기로 해결이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트럼프는 미국의 여러 과제를 해결해 가는데 러시아를 파트너로 만들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장 큰 부분은 대중 견제일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의도를 아는 러시아는 매우 복잡한 계산을 할 것이다. 그러나 제재 해제를 비롯한 적극적인 미국의 대러 포용책은 전쟁을 계기로 심화된 러시아의 대중 의존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완전한 중러 이격은 어렵다 하더라도 중러 밀착의 속도와 수위 조절 측면에서 일정정도 효과를 낼 가능성이 있다.
이에 강대국 간 지정학적 단층지대에 위치한 우리는 급변하는 미-중-러 관계 역학의 흐름, 특히 새로운 변수로 등장한 미-러 관계의 방향을 예측하고 상응한 우리의 외교전략을 세워야 한다.
미러 관계가 악화되어 오는 동안 한러 관계도 부정적 영향을 받아왔으나, 나름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며 교역 규모도 꾸준히 성장해 왔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한러 관계는 수교 이래 최저점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에 우리는 “북러 동맹의 공식 복원”이라는 비극적인 부산물도 얻게 되었다.
수교이래 한국은 러시아가 협력 파트너로서 가장 선호했던 국가 중 하나였다. 특히 러시아 미래 전략의 핵심인 극동 및 북극항로 개발에서 수천 킬로미터 국경을 맞대고 있는 강대국 중국이나 영토분쟁이 미해결 상태인 일본과의 전면적 협력은 러시아에 부담이었다. 이에 러시아가 긴장 요인이 없는 한국과 다방면에서의 협력을 희망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한편, 소련 해체 후 러시아는 북한을 방기하면서 대북 영향력을 상당히 상실했다. 이를 일정 부분 복원하고자 하는 과정에서도 푸틴 정부는 남-북-러 간 철도, 가스관, 전력망 연결 사업과 같이 한국과 함께 하는 윈-윈 프로젝트를 활용하고자 했다. 한국의 역대 정부도 이러한 러시아의 제안에 호응하며 협력을 시도한 바 있으나, 번번이 미러 관계 악화, 북미 관계 악화, 북핵 문제 등으로 좌절되었다.
그런데 향후 트럼프 정부가 여러 국제 현안에서 러시아와의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다면, 여기에 미러 간의 조율된 대북 접근에 대해 북한이 호응한다면 한반도의 안보 지형은 크게 바뀔 수 있다.
무엇보다 북핵 해법에 대한 미러 간 논의 과정에서 과거 러시아와 미국이 시도했던 대북 사업들이 재검토될 가능성이 있다. 2014년 러시아가 북한 내 희토류를 비롯한 광물 개발과 북한 내선 철도 현대화 사업을 연계 추진하고자 했던 <승리(빠베다) 프로젝트>도, 2003년 커트 웰던(Curt Weldon) 미 공화당 의원이 러시아 가스의 북한 공급과 북핵문제를 연계해 풀고자 시도했던 <코러스(KoRus)> 사업과 같은 아이디어도 모두 미러 간 논의 테이블에 올려질 수 있다.
트럼프가 우크라이나전 종전 추진 과정에서 보여주는 방식은 문제 해결과 이후의 실질 협력사업을 연계시키는 협상이다. 이에 우리도 최대한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미국과 러시아가 위와 같은 대북 사업에 협력하는 것을 포함한 한반도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시나리오를 예상하고 대비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대러 관계 회복을 위한 조치들을 하나씩 해 나갈 필요가 있다. 이번 전쟁을 계기로 밀착된 북러 관계를 다소라도 이완시키고 러시아가 과거 표방해 왔던 남북 간 건설적 중재자의 위치로 돌아올 수 있도록 견인하는 노력이 긴요한 시기를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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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림 전 국립외교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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