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긴 줄 서서 기다린다고 좋은 걸 얻는 건 아니다

바다에서 바라본 신기루 같은 멜버른 도시 전경.
-테스만 바다 위에서
오래 기다린다고 원하는 것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목소리 크게 울부짖는다고 좋은 결과를 얻는 것도 아니다. 그 이야기를 해보자.
우리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여행 중이다. Seabourn 여객선에 몸을 싣고 시드니, 멜버른을 거쳐 뉴질랜드 남섬을 돌아 오크랜드까지 도는 3주 여정인데 워싱턴과 달리 이곳은 70도를 넘나드는 한여름의 맑은 날씨에 하늘과 바다 모두 청정구역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겨울에는 멕시코나 남미 그리고 여름에는 캐나다나 북유럽을 오가면서 지내고 있는데 꼭 그렇다고 좋은 것만도 아니다. 옮겨 다니는 것도 준비성과 정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생굴 2점과 구운 새우 2점
오늘 선장이 12시 점심식사로 옥상에서 싱싱한 생굴과 큰새우 점심이 준비되어 있다고 하여 12시 정각에 올라갔더니 아니 벌써 긴 줄이 장사진이다. 준비성은 백인들을 따라갈 수가 없다.
450명 타는 이 배에는 흑인 커플이 딱 두 명, 한인은 우리 둘, 그리고 중국계가 6명, 아시안 여성과 백인 커플이 6쌍이다. 나머지는 모두 백인 부부들인데 싱글로 온 백인 아줌마 4명과 혼자 온 아시아 여성 한명도 있었다. 그 여성들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룬다(많은 크루즈 여행을 하지만 대조적으로 싱글 남성은 거의 없다).
-옛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필리핀 밴드
수영장이 있는 옥상에는 필리핀 밴드가 흥겹게 7080 디스코 음악을 들려주는데 자연스레 몸이 흔들렸다. 작달막한 필리핀 여자가 노래를 아주 흥겹게 잘하며 4명의 남자밴드는 따로 떨구어 놓으면 어느 짝에도 쓸모없을 그런 중년 아저씨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구색은 갖추었다.
마치 지금은 사라진 애난데일의 ‘세븐 스타’ 주점처럼 있을 때는 안 찾다가 없으니 아쉬운 그런 모습이라고나 할까. 여하튼 긴 줄을 서서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리는데 좀처럼 줄이 줄어들질 않는다. 주위를 둘러보니 수영장 주위로는 이미 만석이다.
-기러기 아빠가 된 나
결국 잔머리를 굴려 와이프에게 위층 바에 올라가서 자리부터 잡으라며 보냈다. 30분을 기다려 겨우 그릴에서 구운 새우와 생굴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줄서서 기다린 이유가 그릴 하나로 새우를 굽기 때문이었다.
“아니 새우를 주방에서 구워서 나오면 훨씬 빠를 텐데…” 하는 불만의 소리가 목에서 튀어 나왔다. 그런 나와는 달리 백인들은 모두 옆에 서있는 와이프와 노닥거리며 줄이 길든 말든 상관없이 떠들기 바빴다. 반면에 자리 잡으라고 와이프를 보낸 난 뜻하지 않게 기러기 아빠가 되어 처량하게 홀로 서서 귀중한 30분을 허비하고 말았다.
생굴 4점(1인 2점)과 구운 새우 4점을 들고 와이프에게로 가서 샤도네 와인으로 씻어 내리니 오히려 배가 더 고팠다. 그렇다고 다시 긴 줄을 또 서있을 수도 없어 우리는 식당으로 향했다.
야외 그릴과 달리 식당은 바람 없이 조용하고 차분해서 좋았다. 물론 긴 줄도 없고 젊잖게 앉아서 마이마이를 주문하고 와인을 들이키니 왜 야외 수영장 옆에서 긴 줄을 서서 기다렸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선상에서 바라본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군중심리에 약한 나
조지타운 컵케이크가 맛있다고 해서 1시간 기다렸다가 맛보고 실망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누군가 좋다거나, 같이 하자고 하면 무분별 하게 따라서는 군중심리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생각하니 작금의 정치상황과 겹치며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유색인종이란 서러움을 안고 살았던 나는 유색인종도 한번 해보라고 한 표를 던졌었고, 열심히 살아왔던 내 인생과 달리 무분별하게 퍼주기 식 정책이 싫어 또 다른 누구인가를 찍었었고 또 막말하는 것이 싫어 또 다른 누구를 선택하고 합법적인 이민으로 온 나와 달리 불법이민자들을 방관하는 듯한 정책이 싫어 또다시 누구인가를 선택하는 내 모습에서 기다림의 미학을 찾기 힘들고 내 자신 선택의 시행착오를 거듭함을 볼 수 있다.
기다림 끝에 얻은 새우 몇 점과 생굴 그것들이 나에게 전한 교훈이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매 순간 다가오는 선택의 의미 그리고 그 선택을 한 후의 결과는 과연 우리가 그토록 절실히 원하던 결과였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차분히 받아들이고 기다리는 미학까지를 기대하기란 더욱 힘든 것 또한 현실이다.
-육군보다 해군
허망한 생각으로 잠시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왜 동양 3국은 대항해의 시대를 열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오늘날 해상무역과 유명 여객선 대다수 유럽이나 미국에서 주도하고 있다. 지구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바다를 감안할 때 해군과 해양산업을 육성해야함은 상식이다. 뿐만 아니라 해군이 강한 국가일수록 육군이 강한 나라에 비해 쿠데타가 적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미국, 영국 모두 해군이 강하다. 현재 중국이 해군을 키우는 모습도 시사하는 바 크다.
미 육군에 복무할 당시 항상 “빨리 준비하고 기다려(hurry up and wait)” 라는 말에 식상했었는데 미 해군은 한술 더 떠서 “대기하기 위해 대기해(Standby to standby)” 라는 구호를 외치는 모습에 와우! 준비성과 기다림의 철학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들은 마음에 안 들면 빨리 뒤집어 없어야 속이 편하다. 그런 성격 때문인지 짧은 시간에 다른 이민자들보다 성공했고 대한민국도 성장했다.
-오징어 게임에서 살아남기
2차(?)를 끝내고 식당에서 나오는데 캘리포니아에서 온 중국계 부부와 마주쳤다. 그들도 우리와 같이 긴 줄을 서서 새우 식사를 했는데 도저히 양이 차지 않았다며 정식으로 식사하기 위해 식당에 들어서는 중이라며 어떻게 벌써 두 번 식사를 마치고 나오느냐며 의아해 했다.
내가 ‘오징어 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빨리 빨리 아니냐고 반문하자 남자가 손뼉을 치며 ‘만만디’ 하는 자기는 벌써 죽었을 것이라며 웃는다. 선상 덱에 연어마냥 축 늘어져서 한나절 아무것도 안하는 백인들과 달리 동양인들은 한 끼 식사할 것을 두 번하며 여기저기 오가며 뭐라도 한다. 같은 배를 탄 각양각색의 모습들이 이채롭다.
<
제프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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