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에 들어선 작년 6월 초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와 차고를 열고 차를 세운 다음 집안으로 들어서려고 할 때였다. 어두컴컴한 차고에서 집안으로 통하는 문 옆에 있는 신발장 위에 무언가 보지 못하던 것이 갑자기 눈에 띄었다. ‘이게 뭐지?’ 하며 무심코 들여다보니 신문지로 둘둘 싼 것이었는데 맙소사! 신문지 사이로 크고 붉은 꽃송이가 삐죽 머리를 내밀고 있는 게 아닌가.
재작년 초가을 어느 주일, 성당 교우 한 분이 나를 주차장으로 데려가 신문지에 싼 아마릴리스 구근(球根)을 주면서 내년 봄에 심으면 꽃이 필 것이라고 했다. 그 구근을 받아 들고 집에 와서 차고 안에 있는 신발장 위에 던져 놓고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 게다가 작년 가을 이후 반년이 넘게 항암치료를 받느라 병원에 다니며 병치레 하느라 그 구근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지낸 지 오래였다.
“그래 맞아. 작년에 얻어 와서 여기에 두었지… 깜빡 잊고 있었네.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라고 혼자 말하며 신문지에 싸인 구근을 환한 집안으로 가져와 바닥에 펼쳐보았다. 거의 여덟 달을 깜깜한 차고에서 숨만 쉬며 추운 겨울을 지낸 구근이 신문지 속에서 홀로 키워 낸 크고 빨간 꽃을 드러내었다. 꽃대는 짧지만 굵게 솟아 올라 있었다. ‘나 여기 살아있다고요!’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알아듣거나 말거나 나는 난생처음 꽃을 보며 “정말 미안하다 미안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잃어버린 자식이 집에 돌아온 것처럼 너무 기뻤다. 부엌에 있던 아내도 내가 신문지 위에 있는 꽃에 대고 미안하다고 소리치니 와서 보고는 “어머 정말 신기하네… 나도 깜빡 잊어먹고 있었는데”라고 말했다. 남편 병치레 돕느라고 어디 신경 쓰고 기억할 여유가 있었겠는가.
“우리 집에서 제일 좋은 화분에 심어야겠네요”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빈 화분 중에서 제일 좋아 보이는 것 하나를 골랐다. 마침, 화분용 흙이 남은 게 있어 이 영양가 풍부한 흙을 담은 후 아내와 함께 차고 밖에 신문을 펼쳐 놓고 꽃이 핀 구근을 정성껏 심어 집안으로 데려왔다. “너는 우리 집에서 제일 좋은 곳에 놓일 자격이 있지”라고 말하며 햇빛을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거실 옆 별실의 유리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동안 어둠 속에서 지낸 그에게 조금이라도 보상을 해주는 마음으로.
어둠 속에서 피운 꽃인데도 그 붉은 색은 너무나 진하고 생동감이 넘쳤다. 그리고 가만히 다가가 들여다보니 정서가 메마른 나이 많은 남자인 내가 보아도 너무나 아름다웠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남자가 꽃 한 송이를 보고 눈물이 나다니. 오래 아프다보니 마음도 약해졌나.
진한 빨간색의 아마릴리스에게 나는 진홍(眞紅)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진홍은 옛날 조선시대의 야담(野談)에 나오는 기생(妓生)의 흔한 이름이지만 내가 꽃에 이 이름을 붙여준 것은 진심이다. 아마 평양기생 진홍도 우리 집의 아마릴리스 진홍처럼 화려하고 꿋꿋하고 아름답지는 못했을 것이다.
재작년 가을, 항암치료를 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병실 바닥만 쳐다보던 병원에서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반년 이상 열두 번의 항암 치료를 받으며 아무 데도 못 가고 집에서 유배 아닌 유배 생활을 했던 나의 신세나 어둠 속의 차고 안에서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있던 진홍이의 신세가 다를 것이 무엇이랴.
신문지에 싸여 어두운 차고에서 추운 겨울을 나고 죽지 않고 살아서 기어이 꽃을 피운 진홍이가 내 곁에 다시 온 것은 오랜 치료가 끝나고 암이 사라졌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은 지 며칠 되지 않은 후였다.
나태주 시인이 그랬다지.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고. 그러나 나는 진홍이에게 말했다. “대충 보아도 예쁘다 잠깐 보아도 사랑스럽다 네가 그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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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용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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