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무역기구(WTO)를 창설한 미국이 반도체법(칩스법)을 초당적 합의로 단번에 통과시켰습니다. 본래 자유시장경제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미국이 이제는 산업 보조금을 주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전력·용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만 몇 년씩 걸리고 있습니다. 전략 산업을 두고 강대국 간 다툼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우리가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으려면 정치적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관련 법·규제를 개선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이동훈 켐트로스 대표는 서울경제신문이 지난달 28일 코엑스에서 주최한 ‘소부장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지상좌담회’에서 “지금은 본래 시장경제를 추구하는 미국이 산업 보조금을 주는 이례적 상황”이라며 “우리 반도체 산업이 글로벌 경쟁을 할 수 있으려면 정치권이 초당적으로 규제 개혁 ‘속도전’에 나서줘야 한다”고 호소했다. 2006년 설립된 켐트로스는 반도체 노광(포토레지스트) 공정용 핵심 소재를 생산하는 기업이다.
이날 약 1시간 반 동안 열린 좌담회에서는 이동훈 대표를 비롯해 이재훈 소부장미래포럼 대표, 전윤종 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장, 정기로 AP시스템 회장, 박종욱 경희대 화학공학과 교수가 산업계, 정부기관, 학계를 대표해 국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각종 제언을 내놨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주 52시간 근무제 개편 △미·중 무역 갈등 대비책 마련 △인재 수급 체계 개선 △전방 수요 기업과의 상생 체계 강화 등을 우리 산업계가 해결해야 할 주요 과제로 꼽았다.
▲초당적 협력·지원 시급=참석자들은 초당적 합의로 반도체법(칩스법)을 일사천리로 통과시킨 미국을 사례로 들며 국내에서도 정치적 이해 관계를 뛰어넘는 정책 공조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냈다. 2022년 7월 미국은 자국 내에 첨단 반도체 생산기지를 구축하기 위해 투자에 따른 보조금을 주는 반도체법을 상·하원에서 단번에 통과시켰다. 미국 반도체법은 미국에 공장을 짓는 글로벌 기업에 25%의 세액 공제를 적용하고 직접 보조금을 390억 달러(약 54조 원)까지 주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이재훈 대표는 “미국이 특정 산업 분야에 직접 보조금을 제공하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라며 “반도체와 같은 전략 산업을 대하는 세계 질서가 완전히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이동훈 대표는 “(미국 외에도) 다른 나라를 예로 들자면 일본은 본래 변화 속도가 느린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TSMC 구마모토 팹(생산 시설)을 짓는 데 불과 1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면서 “글로벌 강대국이 24시간 체제로 돌아가는데 우리의 시계는 주 52시간제와 같은 규제에 막혀 있다”고 지적했다.
2018년 시행된 주 52시간 근무제는 산업이나 직종의 구분 없이 일정 규모 이상 모든 기업의 근로자 근무 시간을 일률적으로 규제하고 있다. 여당은 글로벌 반도체 경쟁에 대비해 국내 반도체 연구개발(R&D) 인력을 주 52시간 근무제 예외로 두는 내용의 반도체특별법을 지난달 발의했지만 야당 반대로 본회의 처리가 무산됐다. 미국, 대만, 일본 등 반도체 경쟁국은 반도체 연구자 등 고숙련 화이트칼라 인력은 노동 시간 규제 적용의 예외로 둔다. TSMC 연구개발 팀이 하루 24시간, 주 7일 가동될 수 있는 배경이다.
참석자들은 이날 정부 및 여야가 획일적 노동 규제를 개편하는 데 시급히 뜻을 같이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정 회장은 “주 52시간제 적용을 받은 이후 내부 효율성이 점점 떨어져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세계 주요 산업국을 봤을 때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규제가 주 52시간제”라고 말했다. 이재훈 대표는 “납기가 몰릴 때는 생산력을 더 투입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며 “근무 시간에 대한 어떠한 융통성도 부여되지 않은 상황에서 TSMC와 같은 기업과 경쟁할 수 있겠나”고 반문했다.
우리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소재·부품·장비 등 필수 공급망 생태계를 책임지는 기업에 대한 지원책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전 원장은 “예전에는 제품의 최종 품질·가격을 기준으로 산업 경쟁력을 평가했다면 최근 들어서는 공급망 안정성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강해지고 있다”며 “산기평에서도 이를 감안해 소부장 산업을 역점 분야로 두고 지원하고 있다”고 밝혔다. 전 원장은 “신기술 개발을 중심으로 업계를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중 갈등 심화 대비해야=참석자들은 우리 소부장 산업이 직면한 가장 시급한 현안으로 미중 무역 갈등을 지목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미국 우선주의’를 기치에 내걸고 무역 장벽 강화 및 주요 경쟁국인 중국 견제를 공언하고 있다. 이재훈 대표는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대중 무역 제재나 통제는 더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며 “(우리 기업들이) 중국 이외 시장에서 활로를 찾아야 한다면 정부가 새로운 수요처를 발굴할 수 있도록 정부 간 협의(G2G) 등 각종 네트워크를 활용해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산업계에서는 중국과의 ‘디커플링(탈동조화)’으로 핵심 제품을 수출하지 못하게 되면 국내 소부장 기업 상당수가 고사할 수 있다는 위기감 섞인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정기로 회장은 “한정된 내수 시장을 뛰어넘기 위해 국내 소부장 기업들은 해외 시장을 개척하려는 노력을 해왔고 그 결과 중국 시장에 진출한 기업이 상당히 많다”며 “대중국 수출 비중이 큰 상황에서 수출길이 막히면 생존하기 어려운 회사들이 많다”고 말했다. 이재훈 대표는 “그동안 우리 소부장 산업의 성장에 대한 중국 기여도가 40%는 된다고 본다”고 추정했다.
중국 정부가 ‘중국제조 2025’를 기치로 내걸고 주요 전략 산업을 직접 육성하고 있는 가운데 중국 시장의 위협 및 기회 요인에 대한 입체적인 평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정 회장은 “중국이 글로벌 디스플레이·반도체 시장에서 점유율을 올리는 과정에서 국내 산업 생태계에 미친 영향을 복합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면서 “중국은 산업 경쟁자이기도 하지만 국내 제품을 구매하는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시장이기도 해 우리 산업 생태계의 생산·고용 흐름을 면밀히 따져 중국과의 관계를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재·글로벌화·상생 필요=반도체 산업 전반의 인재 양성 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박 교수는 “실질적으로 연구개발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학부보다는 석·박사 인력인데 국내에 반도체 특화 대학원은 8~10곳 정도밖에 안 된다”며 “연구개발을 할 수 있는 인력이 현장에 부족할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최근 마이크론과 같은 해외 기업도 국내 인재를 채용하려는 움직임이 일면서 주로 수도권 외곽이나 지방에 거점을 둔 국내 소부장 기업의 인력난은 심화하고 있다.
이동훈 대표는 “신기술 개발에 기여할 수 있는 인재를 뽑으려면 대기업 수준 연봉을 연구개발 인력에게 맞춰줘야 한다”며 “다만 그러려면 다른 직군 처우도 크게 높여야 해 현실적으로는 추진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 많다”고 전했다. 전 원장은 “우수한 연구 인력이 있어야 신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만큼 국가적으로 연구 인력 양성을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면서 “인력이 빠져나가면서 기술 유출이 되는 것도 심각한 문제인 만큼 이를 방지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전방 수요 기업인 제조 대기업과의 협력·상생 문화 구축을 강조하는 의견도 다수 제시됐다. 이재훈 대표는 “(일부 기업이) 외국의 비싼 장비를 들여올 때 국내 기업을 2차 벤더(협력사)로 들이면서 가격 협상력을 높이는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 엄혹한 현실”이라며 “이런 협력 문화 속에서는 한국에서 네덜란드 ASML과 같은 글로벌 소부장 기업이 나올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기술 개발을 공동으로 하는 테스트베드(새로운 기술이나 제품, 서비스의 성능이나 효과를 시험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제공해 소부장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고 제언했다.
전 원장은 “안전한 공급망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상생과 협력이 가장 중요하다”면서 “정부 및 공공기관에서도 국내 공급망 생태계 강화를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 재원이 투입되는 각종 산업 연구 과제의 기획·관리·평가 업무를 담당하는 산기평은 대기업과 중견·중소 기업 간 협력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신규 과제를 배정하고 있다. 대기업이 과제에 참여하는 것을 전제로 연구 기업을 배정해 연구개발이 성공적으로 끝났을 때 관련 제품이나 기술이 대기업으로 납품되는 것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정 회장은 “용인반도체클러스터에 수백 조 원이 투입되고, 이 중 100조 원이 장비 구입에 쓰인다고 했을 때 수혜를 보는 국내 소부장 기업이 많지 않다”며 “국내 반도체 산업 생태계를 전반적으로 강화하기 위해 소부장 육성 속도전에 나서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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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영현 성장기업부장 정리=이덕연ㆍ사진=성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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