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럼프 2.0시대 전망한다- 한미통상·경제협력
미국 대선 결과를 보면서 16세기 르네상스시대 사상가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설파했던 리더와 권력에 대한 통찰이 떠올랐다. 두 번의 탄핵, 2021년 의사당 난입, 2022년 중간선거 패배, 대선 후보 최초의 유죄판결, 암살 시도, 막판의 민주당 후보 교체 등 상상을 초월하는 드라마를 거치면서도 미국인들이 트럼프를 선택한 배경에는 인플레이션, 불법이민자 등 내부 문제와 함께 대외적으로 미국의 힘을 투사할 수 있는 두려운 존재, ‘강력한 리더’(strongman)를 선호한 것도 큰 요인이었다.
▲강력한 리더를 원한 미국 유권자
선거를 3주가량 남긴 시점에서 트럼프가 시카고 경제인클럽에서 연설하는 걸 봤다. 한국을 ‘돈 버는 기계’(money machine)로 묘사한 것에 우리 언론들은 초점을 맞췄으나, 필자는 다른 부분에 주목했다. 트럼프가 “프랑스 등 타국 지도자들과 이견이 있을 때 관세 부과로 위협하니 태도를 바꿔 말을 잘 듣더라”는 사례를 허풍을 섞어 과시하는 대목에서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전통적 민주당 아성인 시카고 한복판의 화이트칼라들에게서 이런 반응을 확인한 것이 더 충격이었다. 미국의 지식인 계층마저 왜 트럼프에게 열광하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미국인들이 2016년에는 트럼프에 대해 모르고 투표했지만, 이번에는 그가 누구고 무엇을 할지 정확히 알면서도 교육수준, 성별, 인종 등을 막론하고 지지를 확대한 데는 이런 민심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미 역사에서도 전무후무한 트럼프의 컴백은 단순한 승리를 넘어서 미 정치사회 지형의 근본적 변화(realignment)를 가져올 수 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트럼프 1기 당선은 비주류, 이단 및 일시적 해프닝(an accident)으로 간주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트럼프가 2020년에 연임을 했더라면 그 영향력이 8년 하고 끝났을 것인데, 중간 4년의 공백을 거치며 트럼프가 추구하는 정책들은 오히려 더 체계화, 조직화, 주류화된 것이다.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역사는 전후의 신자유주의로 복귀, 정상화되는 듯했으나, 트럼프 2기의 당선으로 이제는 바이든 행정부가 오히려 거대한 변화의 조류에서 잠시 변이되었던 것처럼 보인다며, 시대의 사조로서 자유주의의 퇴조를 짚었다.
▲스트롱맨의 최대 무기는 관세
미 대선 결과는 한미 경제통상관계 및 글로벌 경제질서에 큰 변화를 가져올 전망이다. 전 세계 주류 지식인들이 비판했던 일반 관세(10~20%), 대중국관세(60%)가 미국민들의 강력한 맨데이트를 등에 업고 거침없이 추진될 것이다. 일반 관세도 그물망을 쳐 놓듯 가급적 넓게 부과하고 나서 각국에 협상 여지를 주며 최대한 양보를 얻어내려 할 것이다. 필자가 주미 대사관 상무관으로 근무했던 트럼프 1기 때는 행정부 내부의 혼란과 갈등, 저항으로 신속하게 진행되지 못했지만, 트럼프 2기의 관세 작전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 1기 행정부의 USTR과 로펌 등에서 일하던 자유무역 옹호자였던 필자의 많은 지인들이 이제는 ‘아메리카 퍼스트’로 전향하며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1기 행정부의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공약을 실현할지를 잘 아는 경험A많고 노련한 전문가들이다.
트럼프발 쇼크는 모든 국가들이 겪는 것이므로, 글로벌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은 상대적인 게임이기 때문이다. EU, 중국, 일본 등이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따라 경쟁구도가 달라질 수 있다. 국가들 간 치열한 수싸움과 합종연횡이 난무할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일하는 자유주의적 성향의 워싱턴 싱크탱크들에서는 트럼프발 관세조치에 많은 국가들이 강경하게 보복조치 등으로 대응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트럼프의 과격한 조치가 수입 물가 폭등 등 미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정책방향 전환의 계기가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죄수의 딜레마’다. 모든 국가들이 단결하여 대미 보복조치를 하면 모두에게 바람직한 결과를 얻어내지만, 정치와 안보가 복잡하게 얽힌 현실에서는 쉽지 않다. 실제로 많은 국가들이 자국만 관세조치에서 예외를 받으려 트럼프 2기에 각종 양보안를 제시할 것이다. 당초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보복조치를 준비하던 국가들도 선거에서 드러난 미국민들의 강한 맨데이트를 확인하고서는 어느 정도로 대응해야 할지 수위 조절에 고심하는 눈치다.
▲중국과 EU, 멕시코가 최대 피해자
트럼프 2기 충격이 가장 클 것으로 보이는 국가들은 유럽연합(EU), 중국, 멕시코이다. 미국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발을 빼고, 관세조치를 시행하면 EU에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EU 내부에서는 중국과 협조해서 미국발 보호주의 조치가 글로벌 경제를 망가뜨리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멕시코는 불법 이민자들의 통로와 중국산 제품들의 우회 수출경로로 1기보다도 어려운 대미 협상이 예상된다. 이미 트럼프는 불법이민자 문제가 해결 안 될 경우 멕시코의 모든 제품에 25%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멕시코를 대미 수출의 생산기지로 삼았던 우리 기업들의 전략도 수정될 필요가 있다.
중국은 트럼프와의 제1단계 협상에서 2,000억 달러의 미국 제품 구매를 약속하고도 이행하지 않았다. 바로 트럼프 관세의 표적이 될 것이다. 이에 중국은 미국으로부터 관세보복조치를 당하더라도, EU 등 미국 우방국들에는 관세를 낮추고 중국 기업들의 투자를 촉진하는 등 회유책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최근 한국을 대상으로 비자면제를 시행한 것도 회유책의 일환으로 보여진다.
다만 이 과정에서 중국의 공급과잉 이슈가 한국 경제로 튀는 것에 대비해야 한다. 미국으로 진출하지 못하게 되면서 EU, 한국, 일본, 아세안 등 국가들로 중국산 저가제품 수출이 범람하는 중국 공급과잉 이슈가 더욱 심해질 우려가 있다. 1기 트럼프에서는 주요국들이 트럼프발 쇼크에 대응하느라 유사국가들 간 협력을 소흘히 했던 반면, 2기 트럼프에서는 글로벌 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를 고려해 EU, 한국, 일본 등의 미들 파워 국가들이 나서서 조율과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해질 것이다.
▲트럼프 2기, 한국 경제의 글로벌화 호기 될 수도
한국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양적 팽창 모델에서 질적 전환을 했고,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 필자는 트럼프 2기를 거치며 한국이 ‘G7 플러스’ 국가로 진정한 글로벌화를 이루며 미들 파워의 리더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1980년대 반도체, 자동차 등 대미 통상마찰을 거치며 수출 의존에서 벗어나 해외투자, 현지화를 통해 환율 변동이나 글로벌 경제환경 변화에 덜 취약한 구조로 전환했다. 연초 일부 언론에서 한국의 연간 수출액이 일본을 추월할 수 있다는 기대를 보였지만 그런 단순비교는 큰 의미가 없다. 수십 년에 걸쳐 일본 기업들은 수출을 해외투자로 많이 돌린 상태이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는 앞으로도 해외에서 성장 동력을 찾아야 하지만, 수출에 의존하기에는 불확실한 환경이 되어가고 있다. 고도성장기에 수출 드라이브의 첨병 역할을 했던 한국의 종합상사들은 많이 축소된 반면, 일본의 종합상사들은 투자 위주의 비즈니스 모델로 진화하며 지금은 워런 버핏이 골라서 투자한 알짜배기 성공 비즈니스 모델이 되었다. 중국 기업들은 1세대로 역사가 짧음에도 불구, 한국 기업들에 비해 훨씬 빠르게 해외 유수기업의 인수합병에 적극적이다. 겉으로 드러난 ‘트럼프 2기’의 경제·통상 위기는 한국 경제가 글로벌화와 구조전환으로 체질을 강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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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한구 전 통상교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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