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비로 5백만원이 오갔다는 한국 뉴스에 생각난 얘기다. 이민 오기 전 그러니까 삼십 년이 더 됐다. 한국에서 신용평가 회사에 다니던 삼십대 초반, 독일계 회사를 심사한 적이 있다. 온양 인근에 공장을 짓는 데 필요한 시설자금 대출과 관련해서다.
독일회사가 현지법인에서 생산하려던 제품은 신발부품이었다. 신발에 무슨 부품이냐 하겠지만 신발이나 전자제품이나 조립라인 생산 시스템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삼색띠를 만들어 아디다스 운동화를 하청 생산하는 부산의 신발업체들에 공급하는 것이 사업의 골자다.
은행에서 의뢰를 받고 접촉을 진행해 온 대상업체의 책임자는 뭐랄까, 외국계 회사 다니는 한국인이라면 떠오르던 그런 느낌 그대로였다. 좋게 보면 깔끔하고, 꼽게 보면 정나미 없어 보이고. 첫 직장인 한미은행에서 외국계 은행 출신분들을 많이 봐서 내 머리 속에는 그런 스테레오 타입이 들어 있었다. 땡하고 일 끝나면 눈치 안보고 퇴근하는, 퇴근 후에도 밥이다 술이다 당구다 어울리지 않고 사진이며 오디오 같은 자기만의 취미가 있는.
일을 하다 보면 학교 어디 나왔는지 묻고 말투 봐서 고향도 넘겨짚고 그러면서 어떻게든 게마인샤프트적 친근감을 끌어내어 게젤샤프트적 거래로 연결짓는 우리네 풍토에서 몇 번을 봐도 여전히 맹숭맹숭하다는 건, 불편을 의미했다. 나로 말하자면 비록 술 한 잔 못할 망정 이차 삼차 파장 때까지 버티며 밥값 술값 정산하고 취한 인간들 택시에 태워 떠나는 것까지 봐야 맘이 편하던 인간이었으니까 그런 상대를 이해는 해도 애정은 하지 않았을 터이다.
석달 기한의 기업진단과는 달리 사업성 평가는 착수에서 보고서 제출까지 한달이 주어졌는데 항상 다른 일도 진행되는 게 있고 해서 얼추 골격을 잡은 뒤 서둘러 현장 실사를 겸한 경영자 면담 일정을 잡았다. 조수와 고속버스를 타고 온양에 내려갔다. 약속대로 터미널 앞에서 기다리던 한국인 매니저 분을 따라 관광호텔에서 독일측 경영진을 만났다. 공장 건축은 예정보다 지연되고 있었고 이들은 그 호텔에서 장기투숙중인 것 같았다.
젊은 사장, 또 젊은 부사장, 나이가 든 공장장 이렇게 세 명의 독일인들과의 면담은 당연히 부장 직함의 한국인 매니저가 통역했는데 이들은 독일어가 아닌 영어로 대화했다. 그래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아디다스라는 이름이 창업주 아돌프(아디) 다슬러에서 나왔다, 아프리카에서 강세인 푸마가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기업이다, 두 형제의 회사는 원수지간처럼 지내지만 자기네는 같은 친척이라서 두 곳에 다 납품한다는 얘기가 재미있었다.
오너 친인척이라 좀 가벼워 보이는 사장, 부사장과는 다르게 나이 든 공장장은 흔히 말하는 독일 장인 그 자체 같았다. 공업학교를 나와 바닥에서부터 잔다리 밟아올라온 그런 기술자. 공장 설계도면을 보여주며 기계실이 정중앙에 자리잡아야 하는 이유를 매우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면담을 마치자 독일인 사장이 식사를 같이 하자고 그런다. 접대받지 않는다는 직무수행 지침이야 있지만 점심 정도인데, 독일사람들 짜기로 유명하다니 뭘 사주려나 궁금도 하고 해서 한두번 괜찮다는 거절 끝에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불가항력으로 식사를 대접받았다.
아, 그런데 정말 이 친구들 너무 하네. 청요리도 아니고 횟집도 아니고 자기들 맨날 먹는 호텔 양식당에서 치킨 어쩌구 하는 걸 시킨다. 양식을 내가 뭘 아나, 똑같은 거 달라고 해서 먹는데 정말 더럽게 맛없었다. 이왕 양식 사주려면 양송이 수프에 돈까스나 함박스텍을 사야지.
별로 속이 편치 않은 상태에서 식사를 마치고 이제 가보겠다는 인사를 꺼내는데 잠깐! 독일인 사장이 한국인 부장에게 눈치로 큐를 줬다. 저 이거 하며 내미는 봉투. 아니 이게 뭡니까. 독일인 사장이 다시 나섰다. Traffic money, just traffic money. 트래픽 머니? 아하, 차비나 하세요 그 말이구나. 한편으로 국적 없는 영어에 웃음도 나고 한편으론 창피하기도 해서 정색을 하고 말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평가해 달라고 은행에서 용역비를 받고 왔다, 받을 수 없다. 은행용역을 따면서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사내에서 업무윤리 강령을 만들 때 위에서 지시 받고 초안 잡은 게 나였다.
독일인 사장과 한국인 매니저는 진지한 내 얼굴에 부닥쳐 봉투를 거두고 자기들끼리 어색함을 감추느라 말을 버벅거렸다. 이 돈은 다시 어카운팅에 넣겠습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 알아들으니 마음이 더 착잡했다.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터미널로 향했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한국인 부장이 헐레벌떡 뒤쫓아왔다. 뛰어와서 그런지 무안해서 그런지 얼굴이 벌갰다. 그런데 이 양반이 웃는 거다. 그동안 절제된 사무적 모습만 보여온 사람이. 고맙단다.
그동안 공장 짓느라 온갖 면허에 허가에 급행료를 마련해야 할 때마다 독일인 사장을 이해시키느라 마음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는 것이다. 핑계 만들어 네가 중간에 해처먹는 것 아니냐는 눈치까지 스스로 봐야 했다며 이러는 거다. 역시 젊은 분들이 다릅니다. 오늘 같은 일 처음입니다. 덕분에 제가 다 떳떳해졌습니다.
지갑을 꺼내더니 있는 돈 다 꺼내준다. 이만오천원인가. 이건 제가 드리는 겁니다. 차비 하세요. 이건 받아주셔야 합니다.
그분이 주는 트래픽 머니는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출장비는 회사에서 정산하고 트래픽 머니는 조수놈과 나눴다. 6대4로. 공평하게.
<
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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