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년 전 헤세도, 한강처럼 저평가됐었다”
① 니콜라우스 다리 위에 세운 헤르만 헤세 실제 크기의 청동상. ② 헤르만 헤세의 3살 때 사진(1880년). ③ 헤르만 헤세의 출생지를 알리는 세 개의 명판. ④ 창문에 꽃이 많은 4층 건물(중앙)이 헤르만 헤세가 태어난 그의 고향집. ⑤ 1400년에 세운 니콜라우스 다리와 1860년에 지은 니콜라우스 예배당. ⑥ 헤세의 책을 번역한 각국의 책들을 모아놓은 헤세 박물관 전시관. ⑦ 독일인들이 사랑한 헤르만 헤세의 소설‘크놀프’ 청동상. ⑧ 헤르만 헤세가 18세부터 3년동안 일한 튀빙겐의 헤켄하우어 서점.
*대한민국 작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이에 한국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역사적 사건이라는 시선과, 역사를 왜곡하거나 잘못 묘사했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한다. 78년 전 헤르만 헤세가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헤세를 작은 사람이라고 평하거나, 아예 경멸하는 독일 작가들도 많았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헤르만 헤세의 고향인 독일 칼브와 그가 마지막 43년을 보내고 묻힌 스위스 몬테뇰라를 찾았다.
# <싯다르타>에는 인도 선교사인 외조부 영향 커
칼브는 소박하고 조용하며 아름다운 목조 가옥들이 줄지어 서있는 마을이다. 빠른 걸음으로 다니면 1시간이면 마을 전체를 돌아 볼 수 있다. 하지만 헤세의 고향집, 헤세 박물관, 산책로, 나콜트 강, 니콜라우스 다리, 헤세 청동상, 크놀프 청동상 등 볼 것이 많아 반나절 이상 천천히 돌아보는 것이 좋다.
헤세는 1877년 7월 2일 개신교 선교사인 부친 요하네스 헤세와 모친 군데르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외가는 스위스계 출신으로 외할아버지는 학식(박사)이 매우 높은 분이었다. 그는 인도 선교사로 파견되어 케랄라 주에서 사용하는 말라알람어와 산스크리트어(고대 인도의 표준 문장어)를 읽고 구사할 수 있었다. 특히 말라알람어는 문법 정리와 사전 편찬까지 하여 케랄라 주에는 그의 업적을 기린 동상까지 세워져 있다. 1911년 헤세가 인도를 여행한 후 산문집 <인도에서>와 소설 <싯다르타>를 발표한 것은 외할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 정상 교육받지 못한 헤세의 비밀
헤세가 4살이 되었을 때 가족은 모두 바젤로 이사했다. 부친이 바젤에서 발간되는 선교회지의 발행인으로 발탁되었기 때문이다. 1886년에 헤세 일가는 다시 칼브로 왔고 헤세는 라틴어 학교인 칼브 실업학교에 입학했다. 1891년(14세)에는 선교사 수업을 받기 위해 마울브론 수도원 기숙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헤세는 가슴 속 깊이 시인의 꿈을 가지고 있던 예님한 학생이었다. 그는 학교에 다닌지 6개월만에 도망치다 붙잡혔으며 학교로 부터 엄한 처벌을 받았다. 그 후유증으로 헤세는 우울증에 빠졌고 친구들에게는 따돌림을 당했다. 자살까지 생각하는 극한 상황이 되자 아버지는 그를 다시 칼브로 데리고 왔다. 두 달 정도 슈테텐 정신병원에서 요양한 그는 칸슈타트 고등학교에 입학 7학년 수료 자격 시험을 치렀다. 헤세는 그 후로는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지 않았다. 성숙한 자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무리를 지어 있는 것 보다는 홀로 공부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 서점 점원과 9년 연상의 여인
헤세는 이때부터 서점의 점원 일을 시작했다. 1895년(18세)부터 3년은 튀빙겐의 헤켄하우어 서점에서 일했다. 그는 이곳에서 신학, 언어학, 법학 등 서적 분류를 하며 책을 열심히 읽고 틈만 나면 시를 썼다. 서점에서 12시간씩 일하며 공부한 책으로는 신학, 문학, 철학 등 다채로웠다. 특히 그는 괴테, 실러, 니체의 글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남들이 모두 쉬는 일요일에도 그는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시와 소설을 쓰며 시간을 보낸 것이다.
그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그의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다. 시집은 자비로 출간했다. 튀빙겐에서 시작한 서점 점원 일은 바젤의 라이히와 바텐뷜 서점으로 26세(1903년)까지 이어졌다. 이때 만난 사람이 9년 연상의 마리아 베르누이다. 그녀는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스위스에서는 최초로 자신의 아틀리에를 운영했던 여인이다. 장편 소설 <페터 카멘친트>가 출간되어 큰 성공을 거둔 것도 바로 이 시점이다.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고 이어 브루노, 하이너, 마르틴 등 세 명의 아이들이 태어났다. 그녀는 교양있는 여인으로 음악적인 재능도 뛰어나 피아노 연주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 신의 음성을 듣다
1915년에는 부친의 사망, 아내의 정신분열 악화, 막내의 중병 등 어려운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결국 헤세는 정신과 치료를 받은 후 스위스 몬타뇰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발표한 작품이 크놀프다. 크놀프는 실연의 상처를 입고 자유롭게 세상을 떠도는 인생의 낙오자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지만 그는 고독한 인간으로 폐에 병까지 얻었다. 피를 토하며 절규하는 그에게 ‘너는 나의 친구이며 내 몸의 일부다’라는 신의 음성을 듣고 크놀프는 평온한 죽음을 맞는다. 헤세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소설은 전세계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칼브에는 2개의 중요한 청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 첫 번째는 2001년 세운 헤르만 헤세 실제 크기의 청동상이다. 청동상은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니콜라우스 예배당과 나골트 강이 흐르는 니콜라우스 다리 위에 세웠다. 헤세를 찾는 독자들이 감격해 하며 어루만지고 기념촬영을 하는 장소다. 두 번째는 2010년, 마을 입구에 세운 방랑자 크놀프의 청동상이다. 크놀프는 마을로 들어 오는 사람들에게 미소를 띄우며 마을 방문을 환영한다.
# 4층 목조주택에 새겨진 3개의 명판
헤세 광장에는 헤르만 헤세가 태어난 고향집이 있다. 흰색, 초록색, 벽돌색의 깔끔한 4층 목조 주택은 1층의 패션 매장을 제외하고는 15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치 꿈을 꾸듯 예쁘게 지은 목조 주택 중앙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입구에는 헤세의 출생을 알리는 세 개의 명판이 새겨져 있다.
칼브는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헤세에게는 너무 좁은 마을이었다. 그래서 그는 방랑자 되어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하지만 칼브는 그의 일생을 통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1895년 그가 칼브를 떠난 후 이 작은 마을은 그의 소설 속에서 영원히 남았다. ‘내 다시 칼브로 돌아왔을 때, 난 이 다리 위에 오래도록 머물러 서있었다. 이 곳이 이 마을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헤세의 청동상 동판에 새겨진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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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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