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주형 산업구조 반영 안돼
▶ 설비 늘어도 물량 확대 제한
▶ 승자독식 AI산업 뒤처지면 끝
▶ 빅테크 기업 투자축소 없을 것
■ 글로벌 IB ‘반도체 비관론’ 타당한가
모건스탠리(MS)·BNP파리바 등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이 최근 메모리반도체에 대한 고점론을 펼치며 잇달아 공세에 나서고 있다. 일반 D램은 스마트폰이나 인공지능(AI) PC 시장이 살아나지 않아 수요절벽에 부딪히고 고대역폭메모리(HBM)와 같은 고부가 메모리는 내년부터 공급이 넘쳐 가격이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게 이들의 논리다.
하지만 반도체 업계에서는 이들이 최근 달라지고 있는 AI 메모리 시장의 구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반쪽 보고서’를 내놓았다는 지적이 함께 나오고 있다. AI 거품이 빠지면서 급격하게 수요가 위축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하고 전략을 짜야겠지만 구조적으로 단기간에 공급과잉이 올 가능성은 낮다는 이유에서다.
최근 공세에 나선 IB들은 대부분 HBM 공급과잉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BNP파리바의 경우 내년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등 메모리 3사의 HBM 생산능력을 웨이퍼 투입량 기준 월 40만 장으로 예상했다. 이는 올해 생산능력 예상치인 월 31만 5000장보다 약 28% 늘어난 수치다. 모건스탠리도 ‘겨울이 다가온다’는 제목의 보고서를 통해 내년 글로벌 HBM 공급량이 250억 Gb(기가비트) 수준으로 내년 HBM 수요량(150억 Gb)을 66.7% 웃돌 것으로 예상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이 같은 전망이 최근 AI 메모리의 생태계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기존 범용 메모리 시장에 통용되던 분석 모델을 AI 메모리 시장에 기계적으로 적용해 일종의 왜곡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실제 AI 메모리는 고객의 주문을 받은 뒤 생산에 나서는 수주형 산업구조이기 때문에 원자재처럼 취급되던 기존 메모리와는 성격 자체가 다르다. 삼성과 SK하이닉스는 물론 마이크론까지도 모두 “내년 물량이 모두 완판됐다”고 밝힐 수 있는 것도 미리 고객이 정해진 이 같은 구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메모리 제조사들의 HBM 투자 결정은 고객 계약 물량에 기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IB들이 공급과잉을 자신하는 또 다른 근거 중 하나는 설비투자 확대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주요 메모리 업체들이 앞다퉈 투자를 늘리고 있어 물량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MS는 “내년 반도체 제조장비(WFE)에 대한 메모리 업체들의 자본적 지출이 1000억 달러(133조 원)를 넘겨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투자 증가가 곧장 공급과잉으로 이어진다는 단순 논리에 무리가 있다고 본다. 특히 최근 메모리 시장은 설비투자가 늘어난다고 해서 생산 물량이 그에 비례해 증가하기가 어려운 구조다. HBM의 경우 5세대 HBM3E라고 해도 고객사 요구에 따라 8단, 12단으로 성능을 매년 개선해 나가야 한다. 2026년부터는 6세대 HBM4 경쟁도 본격화된다. 제품이 한 단계 진화할 때마다 공정 난도도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기 때문에 공급량 확대에 제약이 발생한다.
반도체 장비 업계의 한 관계자는 “HBM은 수율이 50~60% 수준에 불과하고 세대가 진화할수록 수율이 더 낮아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안고 있다”며 “단순히 웨이퍼 투입이 늘었으니 전체 공급량도 증가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시장조사 업체 트렌드포스는 내년 HBM3E 시장에서 12단 제품 비중이 40%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 바 있다.
황민성 삼성증권 연구원은 “12단 HBM 제품의 수율은 8단 대비 통상적으로 10%포인트 낮게 형성돼 있다”며 “12단 중심의 제품 믹스 변화는 그만큼 생산 확대의 난도가 높아진다는 점을 의미하고 공급과잉의 가능성은 더욱 줄어든다”고 분석했다. 이어 “지금 나타나는 설비투자 상향은 생산 제약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어적 성격이 더 강하다”고 덧붙였다.
어쨌든 메모리반도체 입장에서 빅테크들의 투자가 줄어들 수 있다는 점은 부담스러운 대목이다. 다만 빅테크들이 AI 거품론 속에서도 당분간 공격적 투자를 이어갈 것이라는 전망도 만만찮다. 막대한 AI 설비투자가 빅테크에도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승자 독식이 유력한 AI 시장에서 홀로 투자를 줄이는 선택을 감행할 수 없다는 이유다. 마이크로소프트(MS)와 구글, 테슬라와 애플 등의 빅테크들은 자사 기기·서비스에 특화된 맞춤형 AI 가속기와 플랫폼 개발 소식을 끊임없이 내놓고 있다.
KB증권에 따르면 북미 빅테크 업체들의 합산 설비투자 증가율은 올해 1월 10% 수준에서 AI 거품론이 한창이던 지난달 40%까지 급증했다. 올해 이들의 설비투자 금액은 2060억 달러(약 274조 원)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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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제=노우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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