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도 전쟁 뉴스 없는 날이 없다. 오늘도 이스라엘이 레바논 남부에 보복 포격을 하여 어린이들 포함하여 558 명의 아까운 생명이 죽었고 수천 명이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2년이 넘었어도 아직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마음 아프다. 폭력이나 테러, 전쟁 없는 날은 없는가? 전쟁 ‘없음’에서 오는 평화의 오붓함을 맛볼 날은 정녕 멀리만 있는가?
이 가을에 ‘없음’(無, nothing)이 그립다. ‘없음’을 아는 삶, ‘없음’이 있는 세상을 살고 싶다.
눈에 보이는 ‘있음’(有)에 너무도 익숙해진 삶, ‘있음’을 추구하며 ‘있음’의 힘에 의지하여 살아가려는 세상에서, 역설적으로 무소유(無所有) 무욕을 빚어내는 그런 ‘없음’(無)의 아름다움과 홀가분함을 만나며 ‘없음’과 함께 살아가는 삶은 어떨지 싶다.
그런 ‘없음’을 만나 벗하고 싶다. 존재하지도 눈이나 손에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없음’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현상세계에서 있는 어떤 대상의 사라짐, 특정인의 부재(不在)나 정든 사람의 죽음의 경험을 통하여 겨우 ‘없음’의 일면을 포착한다. 있음(有)과 관련하여 없음(無)을 알 뿐이다. 상대적 없음(無)의 경험이다. 존재(存在) 자체와 대비하여 없음을 의미하는 비존재(非存在)로서의 없음 곧 절대적 무는 알 수 조차 없다. 절대적 무는 정말 없기 때문에, 현상계에서 포착할 수 없다. 이처럼 ‘없음’(無)을 발견하고 경험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없음’과의 대면이야말로 마음을 다해 구해야 할 일이다.
없음(無)에 대한 성찰은 다양하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있음(有)과 없음(無)의 대립적 긴장 혹은 상호의존적 관계로 ‘없음’의 개념을 이해하였다. 장자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의 우화를 통하여 쓸모 없음 곧 ‘없음’ 속에 진정한 쓸모가 있음을 말해 주었다. 공자는 무의(無意), 무필(無必), 무고(無固), 무아(無我)의 삶을 통하여 억측 독단 고집 자만이 없는 ‘없음’의 삶을 제시하였다. 공자는 없음을 지닌 삶, 없음에서 나오는 맑음 자유함 부드러움 열림의 아름다움을 알려주었다.
4,5세기 그리스도교 교부철학의 완성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없음(無)’의 개념으로 우주창조를 설명하였다. 하느님은 ‘없음’에서 세상을 창조하였다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가 그것이다. 무에서 우주가 나왔다는 것이다. 무와 유를 인과론적으로 본 그의 무 개념은 동양의 무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없음(무)의 또 다른 면을 보았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는 없음(無)을 세상 모든 것이 나오는 근원적 생성의 자리로 보았다. ‘없음’의 힘을 본 것이다.
예수께서는 ‘없음’(無)을 진리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로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진리와 사랑의 구현을 위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길을 거부하자, 예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르8:34)고 말씀하셨다. 자기를 버리라는 말씀은 세상의 자기(自我, Ego)를 비우고 낱사람 의식을 버리고 부정하라는 것이다. 자기를 해체하라, 자기를 죽여라, 곧 자기 무화(無化)를 말씀하신 것이다. 자기를 버리고 자기 없음의 자리 곧 무(無)의 자리에 들어가라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침뱉음과 조롱을 그대로 받으시며,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던 것은 죽기까지 자기 비움, 자기 무화 곧 자기 ‘없음’의 자리에 서셨기 때문이다.
자기 무화, 자기 ‘없음’의 자리에 들어가야 한다. 없음 곧 무의 순수함에서 아름다움, 사랑, 기쁨, 용기, 힘이 나오기 때문이다. 어린 아기의 얼굴이 저리도 맑고 천진한 것은, 그 얼굴에 걱정 근심 두려움 분노가 없기 때문이다. ‘없음’의 순진무구를 지닌 얼굴이기 때문이다. 저 들판의 꽃들이 저리 아름답고, 새벽하늘과 저녁노을이 그렇게도 아름다운 것은 내가 내 방식으로 무엇을 이루려는 작위(作爲)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없음’의 아름다움이다.
‘없음’은 현묘(玄妙)하고 신비롭다. 우리 마음에 ‘없음’이 있어야 한다. 미움, 분노, 고집, 편견, 욕심, 사나움이 없는,‘없음’이 있어야 한다. 얼굴에 수심 걱정 거만이 없는, ‘없음’이 있어야 한다.‘없음’을 모르고 없음이 없는 사회는 냉혹하고 거칠고 사납다. 모순 명제 같지만 개인의 삶과 우리의 세상에 ‘없음’이 ‘있어야’한다. ‘없음’을 알고 없음과 함께 사는 사람이 그립다. 테러 폭력 전쟁 없는,‘없음’ 있는 세상을 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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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석 성공회 워싱턴한인교회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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