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남아 점령한 중국 전기차
▶일본차 ‘독주’에 브레이크
▶중 정부 막강한 지원 등에 업고
▶‘서방보다 3배 저렴’ 경쟁력 확보
▶일 완성차 전동화 지연 파고들어
▶ ‘속도전’으로 현지 시장 접수
▶아세안 6개국 전기차 점유율 52%
▶태국선 76%…1~4위 모두 중기업
▶‘자국산 선호’ 베트남 시장도 뚫어
▶생존전략 고민하는 일 완성차들
▶2022년 태국 판매량 86%→75%
▶판매량 감소에 현지 공장 통폐합도
▶전기차 SW 개발 협력 돌파구 모색
#. 지난 24일 베트남 하노이에 위치한 중국 전기차(EV) 대기업 비야디(BYD) 대리점. 문을 연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중국 전기차를 구경하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방문객들은 직원들에게 1회 충전 시 주행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충전할 때 위험은 없는지 등을 꼼꼼히 물었다. BYD가 베트남에 새로 론칭한 모델 3종 가운데 하나인 중형 세단 ‘실(SEAL)’을 시승한 투안(40)은 “미쓰비시 엑스팬더(Xpander)를 타다가 차량을 바꾸려던 차에 정부 보조금이 지급된다고 해 전기차에 관심을 갖게 됐다”며 “빈패스트(베트남 전기차)의 경우 회사에서도 근무 중 충전이 가능해 우선순위에 뒀었는데 (시승해 보니) 디자인과 기능, 가격 측면에서 BYD 차량이 더 마음에 들어 흔들린다”고 말했다.
이웃 국가 태국은 ‘전기차 전시장’이나 다름없었다. 지난달 20일 태국 방콕 도로에서는 허중신에너지자동차의 네타(NETA), 광저우자동차그룹 전기차 자회사 아이온(AION), 지리그룹의 고급 전기차 브랜드 지커(Zeekr) 등 중국 전기차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아이콘시암, 엠스피어 등 사람이 많이 몰리는 대형 쇼핑몰에서도 시승 행사가 한창이었다. 지커 판매 담당자는 “내연차는 일본이 최고일지 몰라도 전기차는 당연 중국차”라며 “(우리 회사 제품은) 다른 전기차보다 충전도 빠르고 가격도 합리적”이라고 설명했다.
▲’속도전’으로 동남아 시장 점령
인구 6억7,000만 명의 동남아시아에서 중국 전기차 기업이 저가 공세를 앞세워 빠르게 몸집을 키우고 있다. 동남아 자동차 시장의 전통적 맹주였던 일본 기업 점유율을 뒤엎고 시장의 지형을 바꾸고 있을 정도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에 따르면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10개국 중 6개국(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베트남 필리핀) 전기차 시장에서 중국 회사의 판매 점유율은 2021년 7.3%에서 지난해 52.1%로 수직 상승했다. 국가별로는 태국(76%)과 말레이시아(44%), 싱가포르(34.3%)에서 1위로 올라섰고, 인도네시아(42%)에서는 현대자동차(44.5%)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특히 동남아시아 최대 자동차 생산국이자 수출국으로, ‘아시아의 디트로이트’라고도 불리는 태국에서는 전기차 판매 1~4위를 모두 중국 기업이 차지했다. 전 세계에서 ‘전기차’ 대명사로 통하는 테슬라의 점유율은 7.7%로 5위에 그쳤다.
현재 태국 시장에는 BYD와 창청자동차, 상하이차(SAIC), 아이온, 네타, 치루이자동차 등 중국 전기차 브랜드가 다수 진출해 있다. 이들 기업은 빠르게 세를 불렸다. 아이온의 경우 1년 전 태국에 직원 8명을 파견해 현지 진출 준비를 시작한 지 74일 만에 첫 전기차를 판매했다. 진출 첫해에 41개 전시장을 오픈한 뒤, 지난달 현지 공장에서 생산도 시작했다.
향후 인도네시아에도 공장을 설립해 동남아 9개국에서 판매를 시작할 계획이다. ‘속도전’으로 동남아 시장을 접수해 나가겠다는 전략이다. 세계 4위의 인구 대국 인도네시아에서는 미국 GM과 중국 상하이차 합작사 우링(Wuling)이,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서는 BYD가 각각 높은 점유율을 보였다.
중국 전기차는 진입 문턱이 높던 베트남까지 뚫었다. 중국 BYD는 지난달 20일 베트남 전역에 대리점 13곳을 열고 본격적인 시장 점유율 경쟁에 나섰다. 대표적인 대중 모델 ‘아토3’ 등 3종을 시작으로, 오는 10월부터는 판매 차종을 늘리겠다는 방침이다. 2026년까지 대리점을 약 100개소로 확장한다는 계획도 내놨다.
베트남에서는 현지 최대 재벌 기업 빈그룹 산하 토종 전기차 업체 빈패스트가 전기차 시장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다. 빈패스트는 애국주의에 기반한 공격적 마케팅과 베트남 정부의 자국 생산 차 우대 정책에 힘입어 단기간에 많은 차량을 판매했다. 중국산 전기차가 파고들 여지가 높지 않은 상황임에도 베트남 시장 진출에 나섰다는 의미다.
▲ 저가 앞세워 동남아 시장 공략
그간 동남아 자동차 시장은 일본 완성차 기업의 독무대였다. 도요타, 미쓰비시 등 일본 차 업체들은 1960년대부터 이 지역에 진출해 자동차 공장을 건설했고, 공급망을 확충해 왔다. 몇 해 전만 해도 일본 브랜드 점유율이 90%를 넘을 만큼 압도적 입지를 자랑했다. 그러나 일본 자동차 기업의 전동화 전환이 지연되며 발생한 빈틈을 중국 전기차 회사들이 파고들었다.
자국 정부의 막강한 지원을 등에 업은 중국 기업들은 철옹성 같던 일본의 아성을 무너뜨렸다. 핵심 원자재·배터리·반도체 수직계열화(기업이 자회사를 통해 수직적으로 연결된 구조를 형성하는 전략)와 공정 기술 혁신, 공급망 현지화, 중국과 동남아를 잇는 ‘서부 육해신통로’를 활용한 물류 비용 절감을 통해 가격 경쟁력을 확보한 게 주효했다.
실제 동남아 시장에서 중국 전기차 판매 가격은 주요 글로벌 전기차 브랜드와 비교해 매우 낮다. 예컨대 지난해 태국 시장에서 중국 전기차 평균 가격은 3만 달러(약 4,100만 원) 이하로, 테슬라·BMW 등에 비해 1.5~5배가량 쌌다. 인도네시아 시장에서도 서방 국가의 업체보다 3배 정도 저렴했다.
중국 전기차는 대부분 보급형이다. 중상급 이상 글로벌 완성차 업체의 프리미엄 차종과 직접 경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동남아 지역 소비자들의 소득 수준이 유럽·북미 등 선진국 대비 높지 않은 까닭에 오히려 가성비를 앞세운 중국 전기차 인기가 치솟는 셈이다.
‘메이드 인 차이나’ 차량의 공세에 수십 년간 이 지역을 주름잡던 일본 완성차 기업은 휘청거리고 있다. 2022년 태국에서 판매된 신차 중 일본차 비중은 86%였는데, 지난해 75%로 떨어졌다.
일본 기업들은 시장에서 철수하고 있다. 혼다는 지난달 태국 아유타야주 공장에서 생산을 끝내고 자동차 생산 기지를 쁘라찐부리주 공장으로 통합하기로 했다. 현지 판매량 감소에 따른 결정이었다. 혼다는 “태국 내 자동차 생산량이 2019년 22만8,000대에서 지난해 15만 대로 줄었다”며 “중국 전기차와의 경쟁 격화도 이번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올해 6월에는 일본 자동차 제조사 스즈키가 내년 말 태국 공장을 폐쇄하겠다고 발표했다. 스즈키는 지난해 태국에서 승용차 9,688대를 판매하며 비야디(3.8%)보다 낮은 3.3%의 점유율을 기록했다. 스바루 역시 태국 현지 생산 공장을 폐쇄하고 내년부터 일본에서 차량을 수출해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급부상하는 중국 전기차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 자동차 업체 간 협력 분위기도 강하다. 일본 대표 자동차 업체 혼다, 도요타, 닛산은 전기차 핵심으로 꼽히는 자동차용 소프트웨어 개발과 관련, 상호 협력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인공지능(AI), 반도체 등 분야에서도 손을 맞잡을 예정이다. 서로의 장점을 합쳐 시너지 효과를 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감이 작용한 결과다.
▲서방 고율 관세에 동남아로 눈길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중국을 겨냥한 ‘관세 장벽’을 높게 세우고 있는 가운데, 동남아에서 진행되는 중국의 ‘전기차 굴기’는 당분간 더욱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지난 5월 중국의 저가 공세에 맞서야 한다며 중국산 전기차에 102.5%의 관세를 부과했다.
이 때문에 사실상 중국 전기차의 미국 판매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EU(최고 46.3% 인상)와 캐나다(100% 인상)도 각각 지난달과 이달, 대중 공동 전선에 참여했다. 서방 국가로의 수출이 좌절된 중국 전기차 물량이 동남아로 몰리는 ‘풍선효과’가 발생할 가능성이 더 커졌다는 의미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미국의 고율 관세 부과 결정에 대해 “바이든 정부의 관세 인상은 동남아가 중국 자동차 과잉 생산의 전쟁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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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경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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