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체육관 출입은 내 일상이 되었다. 세상과 사람은 세월 따라 변한다. 10년 전에 비해 체육관을 이용하는 사람의 모습도 많이 변했다. 정보산업 기업들이 몰려있는 도시인 이 곳 체육관에는 젊은 사람, 특히 젊은 여성들이 많이 운동한다. 내 또래 노인들은 별로 보이지 않는 희귀새(rare bird) 신세다.
“하이 버디, 하우 아 유?” 어느 날 체육관에 들어서자 누군가 반갑게 손짓을 한다. 약간의 거북목에 종종 걸음을 걷는 모습은 한 눈에 봐도 파킨슨병을 가진 노인이다. 몇 달 동안 그와 눈인사만 주고받다가 오늘은 서로 대화를 나눴다. 내 이름과 나이를 알려주자 중국사람이냐고 물었다. 남한에서 왔다고 하자 자기는 89세며 한국에는 가본적이 없고, 이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김정은을 잘 처리할 거라며 엄지를 치켜세운다. 대화를 계속하는 중 자기는 한국전쟁 참전 용사로 38선 부근에서 중공군을 기관총으로 많이 쏘아 죽였다고 열을 올렸다. 6.25 참전 용사는 지금 모두 90대로 80대는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중공군은 당시 대부분 38선 이북에서 유엔군, 한국군과 싸웠다. 이에 대해 묻자 그는 말끝을 흐리며 내일 또 만나 얘기 하자며 성급히 자리를 떴다. 방금 자기가 한국에 가본적이 없다는 말을 한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다.
그와 얘기를 나누며 나는 마치 20년 전에 만났던 환자와 대화하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데자뷰(Deja vu, 기시감)라 칭하는 심리현상이다. 기시감은 망각된 기억이나 무의식적 행동이 뇌에 저장되어 있다가 유사한 경험을 했을 때 되살아나는 심리기전이다. 20년 전의 환자는 나만 보면 자기는 한국전쟁 당시 한국을 위해 공산군과 싸웠으니 이제 내가 자기를 잘 돌봐 줄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항상 주지시켰다. 그때 환자의 생년월일을 따져 보니 6.25 참전용사가 도저히 될 수 없는 나이였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한국전쟁 참전용사임을 굳게 믿고 있다. 문제는 사실인 척 참전용사를 가장한 순진한 거짓말이 아니고 사실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무슨 정신질환을 가졌기에 그랬을까 생각해 본다. 최근 체육관에서 얘기를 나눈 노인은 파킨슨병으로 인해 발생한 망상 증세를 가진 치매환자다. 파킨슨병은 나이가 들며 중뇌에 위치한 변연계 흑질에서 분비되는 도파민이 비정상적으로 감소하여 발생하는 퇴행성 뇌 질환의 하나다. 말과 행동이 느려지고, 가만히 있을 때 손이 떨리고, 근육이 대나무같이 나긋나긋하게 경직되는 등 뇌의 운동기능 장애 증상이 먼저 일어난다. 병이 진전되면 몇 년 뒤 기억력, 판단력, 일상수행 능력의 저하와 망상, 환청같은 신경정신 증상을 나타낸다. 통계에 따르면 파킨슨 환자의 거의 50%가 치매증상을 가지고 있다는 수치가 나와 있다.
자신이 한국전쟁 참전용사라고 믿었던 20년 전 노인은 문하우젠 증후군(Munchaugen syndrome, 허위성 장애)란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신체적 증상이나 심리적 증상을 의도적인 거짓말로 과장해서 타인의 관심과 동정을 이끌어 내려는 희귀한 정신질환이다, 18세기 독일 문하우젠 공작이 자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끊임없는 허풍과 거짓 증거의 과정을 통해 진실이라 주장했던 것에서 따왔다, 대리 문하우젠 증후군도 있다. 본인 대신 아주 가까운 배우자나 자식의 건강 상태를 허위로 꾸미거나 과장해서 타인의 관심을 끌려고 하는 소망이다. 두 경우 모두 금전 요구나 범죄 회피, 군복무 이행의 기피 등 어떤 특정한 이득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현대 정신의학 진단 교과서에는 문하우젠 증후군을 신체화 장애의 하나로 분류하고 있다. 반면, 외적 이익을 위해 거짓으로 환자 역할을 하면 꾀병이라 단정한다.
첫 번째 노인은 도파민을 올려주는 약물로 파킨슨병 증상을 완화시켜 주는 게 우선이다. 다음에 불안, 우울, 인지력 저하 같은 정신신경과 증상을 치료해야 된다. 도파민 용량이 너무 높으면 환청이나 망상 같은 정신분열증세가 나타날 수 있으니 조심해서 처방해야 한다. 두 번째 문하우젠 증후군 환자에게는 특별한 약이 없다. 주관적 증상 호소에 따라 이를 완화시켜주는 약물을 처방하고 주로 정신 사회치료에 중점을 둔다.
문하우젠 병의 원인은 잘 모른다. 그러나 상당수의 문하우젠 증후군을 가진 사람은 어린 시절에 격은 심신의 상처로 간호사나 의사의 돌봄을 받아 회복한 경험이 있다. 과거의 상처받은 고통을 극복하려고 반복된 검사와 입원, 수술이 필요한 환자가 되고 싶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대부분의 문하우젠 환자는 자아상 결핍과 정체성 빈약이 특징인 피학적 성격이나 경계성 성격을 보이는 것이다.
<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