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트남 ‘게임 체인저’ 급부상
▶ 정치 안정·지정학적 등 매력
▶특정국 편중 지양 ‘대나무 외교’
▶‘포스트 차이나’ 넘어 몸값 쑥쑥
“베트남을 ‘제2의 고향(second home)’으로 만들겠습니다.”
지난해 12월 베트남을 방문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베트남의 인공지능(AI) 산업 잠재력을 강조하며 이같이 말했다. 그로부터 5개월이 지난 올 4월 엔비디아는 베트남의 정보통신기술 대기업 FPT와 손잡고 ‘AI 공장’을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팀 쿡 애플 CEO도 지난해 12월 베트남을 찾아 투자 확대 방안을 논의했다. 미국 빅테크(대형 기술 기업)들이 동남아시아 지역의 생산 거점으로 베트남을 선택한 배경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정치적 안정, 지정학적 이점, 거대한 소비 시장 등을 베트남의 매력으로 꼽는다.
▲탄탄한 제조업이 경제성장 이끈다=베트남은 지속적인 인프라 투자, 1억 명에 달하는 인구를 앞세워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2%대)를 제외하면 대부분 5~7%대의 좋은 성적을 냈다. 지난해 싱가포르·일본·한국이 1%대 성장에 그쳤지만 베트남은 5% 뛰며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였다. 올 상반기 수치는 6.4%로 5%인 중국을 제쳤다.
베트남의 경제성장을 이끄는 동력은 제조업이다. 베트남의 국내총생산(GDP) 중 약 40%가 2차산업에서 나온다. 제조업 강국이라는 강점을 내세워 해외투자를 이끌어내고 이를 기반으로 높은 경제성장률을 내는 ‘선순환 구조’가 정착했다는 평가다. 급속한 경제 발전 덕에 국민들의 소득수준이 높아지며 소비 시장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이 앞다퉈 베트남으로 향하는 배경이다. 실제로 올 상반기 베트남의 외국인직접투자(FDI) 유치액은 151억 9000만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13.1% 증가했고, 신규 프로젝트는 1538건으로 최근 5개년 중 가장 많다. 해외투자가들은 가공·제조업 부문에 전체의 70%에 달하는 106억 9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대나무 실리 외교 통했다=베트남의 경제 성과 뒤에는 ‘대나무 외교’가 자리하고 있다. 뿌리가 단단하지만 가지가 유연한 대나무처럼 실리를 추구하는 것이 골자다. 최근 서거한 응우옌푸쫑 전 공산당 서기장이 2016년 “국가 주권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세계 지도자들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해야 한다. 호찌민 주석이 좋아했던 대나무처럼 굳건하고 유연한 외교 방식을 취해야 한다”며 방향을 제시한 뒤 베트남 외교정책의 중심축이 됐다.
미중 무역 갈등으로 전 세계가 미국과 중국의 눈치를 봤지만 베트남의 행보는 달랐다. 외려 글로벌 경제 영토에서 힘을 키우는 계기로 삼았다. 스스로 몸값을 높이는 ‘대나무 외교’ 전략으로 정치적 안정과 실리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며 글로벌 열강의 핵심 무역 파트너로 자리를 잡았다.
대나무 외교정책은 △군사동맹 배제 △특정 국가 편중 지양 △베트남 영토 내 외국 군사기지 불허 △국제 관계에서 무력 불사용 등의 원칙을 주된 내용으로 한다. 이는 곧 정치적 안정으로 이어졌고 해외투자 시 안정성을 따지는 기업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미중 무역 갈등이 고조되자 많은 기업이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대안을 찾는 과정에서 베트남을 택했던 이유다.
▲‘포스트 차이나’ 넘어선 위상=글로벌 패권을 주도하는 ‘게임체인저’가 된 베트남은 최근 1년간 미국과 중국·러시아 정상을 잇따라 자국으로 초대하며 대나무 외교의 정수를 보여줬다. 지난해 9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을 계기로 양국은 10년간 유지했던 ‘포괄적 동반자 관계’를 ‘포괄적 전략적 관계’로 두 단계나 격상했다. 중간 단계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건너뛴 파격이었다. 대중 제재 수위를 높이고 있는 미국은 공급망(원재료의 확보에서부터 제품의 최종 소비에 이르기까지의 연결망)을 다양화하는 차원에서 베트남을 주목하고 있다.
미국과 베트남의 관계가 격상되자 중국도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지난해 12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베트남을 방문해 양국 관계를 ‘미래 공유 공동체’로 발전시키고 경제·안보·사회·문화 등 전 분야에 걸쳐 36개의 합의문을 체결했다. 중국은 자국 기업에 대한 미국의 제재를 피해 베트남으로 생산 거점을 옮기고 있다. 중국이 지난해 베트남에 투자한 금액은 82억 달러(약 11조 3324억 원)에 달한다. 명실공히 베트남 최대 투자국이다. 올 6월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하는 등 베트남은 러시아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베트남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지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 모호한 입장을 취하며 실리를 챙기고 있다는 평가다.
전문가들은 베트남이 중국을 대체하는 ‘포스트 차이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한다. 인도태평양 중간에 위치한 베트남은 중국이 뻗어나가려 하는 남중국해 옆에 자리하고 있어 미국으로서는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지정학적 요충지다. 11월 미 대선 이후 국제사회에서 신냉전 구도가 강화될 것으로 예상되고 동남아가 점점 친중(캄보디아·라오스)과 친미(필리핀)로 갈라지고 있는 만큼 ‘대나무 외교’ 전략을 펴는 베트남의 몸값은 더욱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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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제 변수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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