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좋아하시던 이 지역 올드타이머 모임에서 자리를 파할 때 부르던 노래가 있다. 좌중의 어르신이었던 장대욱 장로님이 유달리 좋아하셔서 그랬던 걸까, <석별>을 합창했었다.
서편의 달이 호숫가에 질 때에
저 건너 산에 동이 트누나
사랑빛이 감도는 빛난 눈동자에는
근심 어린 빛으로 편히 가시오
친구 내 친구 어이 이별할까나
친구 내 친구 잊지 마시오
음악 교과서에 <친구의 이별>로 나와서 입에 익은 가사지만 1910년대생 어르신도 아시는 오래된 노래인 만큼 번안곡일 확률이 높다. 궁금해서 악보를 찾아보니 ‘스페인 민요’라고 적혀 있다.
스페인이라? 음, 번안곡들이 대개는 미국 선교사 따라 혹은 식민지 시절 일본을 통해 들어온 걸로 아는데 의외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봤다. 원곡은 <후아니타(Juanita)>. 그 별칭이 ‘스페니쉬 발라드(A Spanish Ballad)’, ‘스페인의 노래(A Song of Spain)’여서 스페인 민요라는 딱지가 붙었나 보다.
영어가사를 보면 스페인어는 후렴에 부르는 여인의 이름, 제목의 ‘후아니타’만 나오는데 스페니쉬 원래 가사가 따로 있는 건가. 검색에 나오는 어느 블로그에서는 미국 노래라고 소개한다. 1855년 캘리포니아에서 나온 악보로 봐서 멕시코 영향이 짙은 사랑 노래라는 설명이다.
그럴 듯하다 싶었는데 작사자 이름이 나오기에 한 걸음 더 들어갔다. 캐롤라인 노튼(Caroline S. Norton, 1808~1877). 헐! 영국사람이다. 미국 땅에는 발 디딘 적 없다. 게다가 꽤나 유명한 인물이다. 거기에다 영국 여성법의 어머니?
혹시 동명이인이 있을 수 있어 다시 찾아봐도 생몰년도가 같고 이 노래를 만든 배경 해석의 글이 튀어나오는 걸로 봐서 확실하다. 1853년 영국의 체펠 사에서 출간한 <사랑의 노래(Songs of Affection)> 모듬 악보집에 들어갔다. 작곡이 남성들의 전유물이던 시절에 여성이 만들어서 대대적인 히트를 친 이정표적인 노래다. 구애를 받는 대상으로만 그려지던 여성이 적극적인 사랑의 감정을 드러내는 가사도 획기적이었다.
스페인은 그저 설정일 따름이다. 스페인, 포르투갈이 영국의 도움을 받아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물리친 반도전쟁(Peninsula War, 1807~1814)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 사회에 스페인풍을 불러왔다. 한류처럼 이베리아류라고 불러야 하나. 검은 눈동자의 여인 후아니타, 얼마나 이국적인가.
후아니타는 여기서 스페인 여인을 일컫는 일종의 대명사다. 남자이름의 존(John)과 같은 격의 여자이름이 제인(Jane), 제인의 스페니쉬 이름이 후아나(Juana), 후아니타는 후아나를 친근하게 부르는 애칭이다.
캐롤라인 노튼은 미모면 미모, 총기면 총기, 문장이면 문장 모두 알아주던 사교계의 셀렙이었다. 배운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세 자매는 각자의 능력으로 각자의 삶을 헤쳐가야 했다.
이 팔방미인의 불행은 자기보다 못난 남자를 만난 데서 왔다. 남편은 뭇 남자들의 관심을 받는 아내의 인기에 덕을 봐 한 자리 하면서도 질투는 질투대로 부렸다. 손찌검까지. 아내와 내통했다고 정계 유력인사에게 말도 안 되는 간통 소송을 걸었다. 흑색선전으로 뒷거래를 노린 것이다. 캐롤라인은 집을 나왔고 찌질이 남편은 이혼은 안해주면서 아내가 세 아들들을 보지 못하게 했다. 위자료는 주지 않으면서 아내가 책을 쓰고 노래를 작곡해서 받은 인세를 탐했다. 아내는 남편의 소유물이었던 시절이니까.
캐롤라인은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지난한 싸움을 통해 부당한 처우를 받는 여성들의 권리 확보에 앞장서는 사회개혁가로 살았다. 유아 양육권법(1839년), 이혼에 관한 법률을 개선한 혼인 사유법(1857년), 혼인여성의 재산관련법(1870년)이 그녀가 쌓은 공적으로 꼽힌다. 산업혁명기 아동들의 노동착취를 시로 써서 항변하기도 했다. 무릇 작가의 힘이란 이런 것 아닐까.
옛노래를 더듬어 가다가 몰랐던 삶을 만나니 너무 재미있어서 정리했다. 나만 재미있나.
<
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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