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이 정신세계를 지배해 온 일도 어제오늘이 아니다. 이제는 당연시되어버렸다. 이제는 케케묵어서 꺼내기조차 진부한데 인문학은 갈수록 쇠퇴해 가고 있다. 생각은 보이지 않는 세계이다. 동물들도 생각이 있다. 그렇지만 본능과 경험, 습관에 의해서 행동한다. 인문학자들은 인류의 진화와 그 속도가 동물들과 근본적인 차이가 ‘생각의 질’의 차이로 귀결된다고 보는데 생각하기를 회피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보니 진화의 답보요 미래의 불안이라고 역설한다. 그런 점에서 불행하게도 역사의 퇴행(退行)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특히 선거 결과를 보면 더 그렇다.
공천(公薦)이란 정당에서 선거에 출마할 후보자를 공식적으로 추천하는 일로 정당의 정체성, 유권자의 요청, 당선 가능성 등을 망라해서 추진한다. 이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매 선거 때마다 발전시켜오고 있지만 완벽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갈등과 논란의 소지가 많다. 그중에서도 한국에서 특별한 것이 현역 교체 여론이다. 이런 현역 교체 시스템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지만 유권자들의 요구와 여론은 분명하다. 한국갤럽에 의뢰해 지난달 2/22~23일 양일간에 걸쳐 성인남녀 1천1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결과에 따르면 58%가 현역 교체를, 현역 유지 응답은 28%에 불과했다. 막상 22대 총선의 공천 결과는 민주당의 현역 교체비율은 69명으로 45%, 국힘당은 40명에 34.1%다. 양당 모두 국민 여론에는 모두 미치지 못하지만 상대적으로 어느 당이 국민 여론에 충실했겠는지는 판단에 맡긴다. 그런데 언론이나 여론은 ‘시끄럽고, 조용하고’라는 해석을 내놓고 국민들도 말 따로 행동 따로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집권이래 6차례에 걸쳐 총 9건의 법률안 거부권을 행사하는 역대 최고의 거부권을 행사했다. 대부분 민생법안이고 권력견제 법안들이지만 이를 의회 권력의 횡포라고 하고 있다.
2023. 4월 양곡관리법 개정을 거부했다. 생산량이 초과되거나 쌀값이 폭락하면 정부가 조절하는 법안은 여태 해오던 것인데 ‘할 수 있다’를 한다’로 바꾸자고 하니 거부해 버린다. 대파 사건은 그대로 부메랑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농민들은 실제로 어느 당에 투표를 할까?
5월에는 간호법을 거부했다. 국민적인 동의였고 윤석열 후보의 대선공약이었는데 의사들이 반대한다고 거부해 버렸다. 지금의 의대 증원 문제가 터지고 나니 이제서야 다시 들여다보겠다고 한다.
2023. 12월 노동조합법(노란 봉투 법)을 또한 거부한다. 노조를 ‘국민의 적’으로 돌려버렸다. 그런 노조나 노동자들도 투표 때는 이율배반적이다.
방송 3법은 정파를 초월한 언론자유를 위한 법안이었지만 여지없이 거부해 버렸다. 지난 3월 7일 스웨덴의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의 2024 보고서는 한국의 민주주의 지수가 21년(17위)에서 23년 47위(179국 중)로 독재국가로 진행 중이라고 평가했다. 언론계 종사자 중에서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이태원 참사 특별법의 거부는 인륜을 저버리는 것이다.
마침내 새해 들어서는 국민의 70%가 원하는 가족과 검찰 관련인 쌍특검(김건희,대장동)까지 거부하는 만용을 부렸다.
이제는 이런 게 하나도 이상하지도 않다. 앉은 자리에서 했던 말을 일어서면 눈 깜짝 않고 부정해 버리는 걸 눈앞에서 보면서도 제대로 판단을 못한다. 더 큰 문제는 눈앞에 닥친 민생과 경제적 어려움을 ‘평가’ 받아야 할 정부가 도리어 ‘심판’하겠다고 하는데도 어리둥절할 뿐 한 겹 너머 생각을 않으려고 한다.
‘사람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그들을 사육하는 정부에게는 얼마나 큰 행운인가,’ (아돌프 히틀러)
‘평소에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실제로 옳을까?’ 선거를 앞두고 한 번쯤 이에 대해서 고민해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은 자신의 행동이나 선택에 대해서 방어기제(防御機制)를 무의식적으로 예비한다.
프로이트(1856~1939, 오스트리아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사람의 마음에는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심리가 있다는 것인데 특히 선거철이 되면 출마자와 유권자 사이에 아주 복잡 미묘한 방어기제들이 상호 작동하게 된다. 특히 자신이 평소 ‘묻지마 지지층’이라는 소위 정치 고 관여층일수록 이런 비난, 불안감, 억압, 퇴행, 부정, 합리화, 죄책감까지 아주 다양한 형태로 심리 작용들이 나타나면서 자신이 뭘 어떻게 판단하고 선택해야 하는지를 의도적으로 회피한다. 그런 것은 개인적인 불행을 넘어서 사회나 국가적으로도 불행한 일이다. 서너 발작 물러서서 ‘생각’해 보는 인문학적 사유(思惟)가 아쉬운 지점이다. 국가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그렇다.
2024.4.11일 22대 총선 뒷날 아침을 한번 미리 그려보자. 잔치가 요란할수록 그 뒤끝은 더 허전하다. 배우들은 떠나버리고 국민(주인) 각자들의 눈앞에 놓여있는 것은 가계의 현실이다.
기억에서 멀지 않는 두 선거를 보자. IMF 구제 요청일은 1997.11.21일이고 한달 뒤 15대 대선(1997.12.18)이었다. 도탄에 빠졌던 시기였지만 당선(김대중)이 되자마자 짧은 취임전까지 극히 짧은 시간 내에 경제 패러다임을 바로잡았던 적이 있었다. 2017 3.10 탄핵(박근혜) 되고 두달 후 2017.5.9일 19대 대선(문재인 당선)이 이어졌지만 탄핵으로 어수선했던 정국이 불과 한달 만에 바로잡아지는 것도 보았다.
나라가 이미 망해버렸거나 망해가고 있는데도 빨갱이들에게 나라를 넘겨 버릴 것이라는 그 당시의 ‘허무맹랑(虛無孟浪)’을 기억했으면 하고 이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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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구 메릴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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