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미엽 할머니 댁에서.
이 글은 한국과 쿠바가 수교(2024.2.14) 전이던 2023. 8/14~8/18까지 쿠바를 방문한 현지 기록입니다. 민주 평통 워싱턴 회장 재임시 미주협의회 차원의 방문단 일원으로 방문하였고, 글의 말미에는 193번째 수교국이 된 걸 계기로 한반도통일에 대한 상념을 조금 보태고자 합니다.
6. 헤로니모 임
필자의 눈에 띄는 여성분이 한 분 계셨다. 언뜻 봐도 70은 훌쩍 넘어 보이는(실제로는 80이 넘었다) 노인이었다. 연세 있는 분들에게서 보이는 한국계 외모보다 거의 순수 한국계라고 해도 무방할 외모였다. 금방이라도 한국말로 대화가 오갈 것 같은 친숙함이 느껴졌다. 뭔가를 들고 행사장 여기저기 분주한데 첫눈에 인텔리 여성의 풍모가 보인다. 젊었을 때 학문적 깊이가 있든지 아니면 그런 계통에서 근무했을 것이라는 추측만 했다. 광복절 행사의 거의 마지막에 그 분이 단상에 섰다.
마르타 임(임은희), 쿠바 한인의 역사 『COREANOS EN CUBA』(2001)를 출간한 철학박사였다. 물론 대학교수 출신이다. 그 분에 대한 아무런 정보를 갖고 오지 못했다. 후덥지근한 곳에서 열린 기념식이지만 꽤 많은 분들이 참석해서 아주 정결한 종교의식처럼 78주년 광복절 기념식이 경건하게 진행되고 있는데 필자에게는 가장 중요하고 관심이 가는 연설장면이었다.
스페인어로 말하고 통역이 이어졌다. 대한민국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과 긍지, 아버지 나라에 대한 동경과 바람 등을 절절하게 쏟아내고 있었다. 행사를 마치고 나서도 인터넷이 불비한 상황이라서 그 분에 대한 정보를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미국에 돌아오고 나서야 뒤늦게 이렇게 후회의 탄식을 장황하게 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럽다.
헤로니모 임(임은조), 낯설지 않았던 이름, 전후석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헤로니모’의 주인공, 지상파에서도 기획 프로그램으로 모두 방송했는데도 소개 자막 정도로 무심코 지나쳤던 회한이 너무나도 크다. 1959년 쿠바혁명의 주역이던 피델 카스트로와 대학동기, 혁명 당시 도시게릴라 조직을 이끌었던 한인 혁명가, 혁명정부에서 산업부 차관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2004년 한국방문, 1985년에 작고한 선친 임천택의 유해를 안고 방한해 국립현충원에 안장, 2005 코트라 아바나 무역관 설립, 방한 후 돌아가서 쿠바 한인회 조직을 위해 필생을 노력을 하였음.
선친 임천택 선생은 3세 때인 1905년 어머니를 따라 멕시코 애니깽 농업이민을 떠남, 1921년 멕시코 애니깽 농부 300명과 쿠바로 이주한 쿠바이민 1세대 한인 리더, 백범 김구의 자서전에도 언급된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내온 쿠바 한인으로 기록됨, 1926년 아들 헤로니모 임(임은조)을 쿠바에서 낳음. 마탄사스와 카르디네스에 한국어 학교를 설립 교장을 역임함.
헤로니모 임이 2006년 세상의 눈을 감을 때 어떤 생각이었을까. 1995년에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 후 2004년 두번째 방문을 마치고 나서 2년 후 생을 마감한다. 나이 70이 된 1995년에 수구초심의 마음으로 아버지가 그토록 그리고 독립자금을 보냈던 그 조국에 도착해 본 그 마음은 어땠을까.
그가 쿠바로 되돌아가서 했던 일은 바로 ‘민족’이었다. 한국인 상징탑을 세우고 이민역사를 가르치고 선친의 유업에 따라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로 남은 생을 마감한다.
7. 100세 주미엽 님을 만났다
지금은 해가 바뀌어서 101세가 된 주미엽 할머니를 만나는 것은 이번 여행 목적 중에서 개인적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필자의 모교인 전남대학교 인문대학장을 역임한 김재기 교수는 정치외교학과 후배다. 미주 각지의 한인 독립운동사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뉴욕타임스 지에서 한인들이 3.1운동 당시에 벌였던 독립운동 관련 사료와 독립자금 관련 자료들을 발굴하기도 하였고, 멕시코 초기 한인들의 독립운동에 관해서 탐문을 하던 중 자연스럽게 쿠바에까지 그 연구 발굴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그때그때마다 신문에 실린 연구결과를 내게 보내왔다.
2년 전부터 쿠바에 관한 내용들을 전해왔다. 그 중에는 1930년대에 쿠바의 한인민성국어학교 초등학생들 21명이 바로 직전 해이던 1929.11.3일 광주학생운동의 소식을 전해 듣고 성금을 모아서 고국에 보낸 사실을 발굴해서 발표했던 기사를 전해왔다.
그 명단에 1923년생, 지금은 100세가 된 당시 7살이던 주미엽 학생의 이름이 있었고, 뒤이어 1942년 신한민보에 실린 자료를 보면 1938년에 결성된 쿠바 대한애국여자단의 독립자금 모금활동 사진에도 주 할머니의 모습을 찾아냈다고 한다.
쿠바 여행이 결정되고 난 뒤 김 교수와 연결이 되었다. 관련 자료를 더 보완해서 받고,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는가를 물었다. “그분이 올해 100세입니다. 100세 잔치를 한 번 해드리는 것은 어떨지요.”
방문할 때 선물로 뭘 가지고 가면 좋겠습니까, 또 물으니 기초 생필품이 좋겠단다. 치약, 칫솔, 비누3종 세트다.
이윽고 미국으로 되돌아오기 전날이었다. 다른 일정들을 거의 마친 상황이었지만 일행들이 아바나 시내 유적지와 관광을 하는 시간에 정효현 민주평통 중미협의회 쿠바 분회장님과 박요한 미주부의장, 박래곤 중미멕시코협의회장, 파라과이 분회 장국현 분회장님이 동행하기로 하고 택시를 대절했다.
20분 거리라고 하는데 꽤 오래 걸렸다. 막상 화려한 아바나의 도심을 약간 벗어나 부도심 거주지역으로 들어서니 쿠바와 쿠바주민들의 생활상이 그대로 드러났다.
미국의 할렘가와 같은 골목길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다만 사람들이 훨씬 많고 사람들로 붐빈다. 이색적이긴 하지만 만약 택시가 고장이라도 나서 멈춘다면 하고 걱정도 했지만 택시운전사나 현지에 사는 정 분회장님은 편안해 보였다. 택시운전사도 집을 못 찾아 몇 번이고 차를 돌려세우다가 번지수로는 찾을 수가 없어서 차에서 내려서 묻고 또 물어서 집앞에 도착하니 주미엽 할머니의 아들이 반갑게 마중 나왔다.
집안으로 들어서니 흔들리는 백열 전등 아래 사진에서 뵙던 고운 분이 스페인계 며느리와 앉아 계셨다. 김 교수 사진과 다른 매체에 실린 사진의 옷과 오늘 입은 옷이 똑같다. 아마도 특별한 때만 입은 옷 같아 보이는데 남루하다. 말없이 손을 잡았다. 따뜻하다.
정 분회장이 통역을 하고 기본적인 가족의 안부들이 오갔다. 가져간 물품들을 드렸더니 며느리가 아주 좋아한다. 쿠바 정부에서 주는 배급 물품의 품질이 아주 조악해서 가져간 물품들은 쿠바의 최상류층에서도 구경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헤로니모 임의 노력으로 쿠바 한인 후손회 중에 30~40명만이 대한민국 정부의 독립유공자 혜택을 받는데 현지에서는 엄청난 혜택이라고 한다. 주미엽 할머니도 현재 그 대상에 추서가 진행되고 있는데 돌아가서 도울 수 있는 길이 있는지 노력하겠다는 말을 전하고 되돌아 나왔다.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주머니에 있는 돈과 입고 있는 옷 최소한을 남기고 돌아온다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옷은 호텔에 있으니 미리 준비한 돈과 주머니의 잔돈을 모두 봉투에 넣으니 같이 갔던 일행들도 주섬주섬 보탠다. 우리에게는 약소한 액수지만 2년치 의사 월급 정도를 즉석에서 모아서 화장실 수리하시라고 드리고 나왔다.
8. 쿠바에서 통일을 생각하다
돌아와서 글을 쓰는 지금도 쿠바의 역사적 운명을 생각해보고 또 쿠바의 미래를 상상해 보면 화가 나기도 하고 희망이 보이기도 한다. 한반도의 북쪽 상황과 아주 유사하면서도 다르기도 하고 지리적, 문화적으로 전혀 다를 것 같은데도 너무나 닮아 있다는 생각에서 그렇다.
쿠바 현지의 경제상황은 어쩌면 북한보다도 더 열악할 듯했다. 섬나라인 쿠바는 핵무기도 없는데도 남미 국가중 베네수엘라와 함께 미국에 대한 민족주의와 주체성을 가지고 정치를 하는 국가로서 미국에 의해 테러지원국으로 지목된 이후 수십년 경제봉쇄로 인하여 피폐할 대로 피폐해 보였다.
사유재산이 인정되고 있는 점에서는 자본주의적 상업기반이 작동하고 있었지만 물자의 부족으로 인하여 수도 아바나와 휴양지를 제외하면 1959년 쿠바혁명 당시에서 멈춰서 있는 듯이 보였다. 부패를 완전 추방하고 절대적 평등을 기치로 혁명을 성공하였지만 이런 혁명정신이 거대한 자본주의 물결로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보였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아직까지도 국민생활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 보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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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구 전 워싱턴 평통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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