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사진 대지 위에 단정하게 올라앉은‘여주서가’. [김용수 건축사진작가 제공]
다이닝 공간과 리빙 공간을 일자로 배치하고 전면에 큰 창을 내 공간감을 살렸다. [김용수 건축사진작가 제공]
다이닝 공간에 비해 아담하게 마련한 거실. 외부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낸 상단 창에는 주변 산세가 담긴다. [김용수 건축사진작가 제공]
“처음부터 낯설지가 않았어요. 도로에서 조금 들어왔을 뿐인데 세상과 동떨어진 별천지 같았죠."
은퇴 후 살 집을 지을 대지를 찾던 유광옥(61) 서명주(60) 부부는 서울 근교를 돌아다니던 어느 날 나지막한 숲을 낀 경기 여주 땅의 정취에 매료됐다. 남편이 꿈꾼 목수의 삶, 아내가 품은 정원 가꾸기 로망이 눈앞에서 슥슥 그려지는 느낌이었다. 조급해진 마음에 평소 눈여겨보던 서성직(바이핸드건축사사무소 소장) 건축가를 찾아가 정원이 있는 공방주택을 의뢰했다. 조건은 하나였다. 건축가가 설계부터 시공, 감리까지 건축 전반을 책임져 달라는 것. 여러 날 고민 끝에 승낙한 서 소장은 부부의 평생 꿈인 주택공방 프로젝트를 맡았고, 부부는 지지자이자 건축주로서 바람을 더했다.
1년여 작업 끝에 살림집, 목공방, 정원을 갖춘 단층 주택 ‘여주서가'(대지면적 1,135㎡, 연면적 164㎡)가 자리 잡았다. 지난해 5월이었다. “아내가 서씨라 서가(徐家)라고 했는데,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집'이라는 의미를 담았어요. 목공 일도 정원 일도 긴 호흡으로 하는 일이니까요."
■ ‘자두나무’가 설계한 집
서가의 외관은 묵직하고 덤덤하다. 300평 규모의 넓은 땅 가장자리에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한 건물 두 채가 반듯하게 자리 잡았다. 오직 콘크리트뿐, 눈에 띄는 외장재도 없고 집을 둘러싼 담도, 이렇다 할 장식도 없다. 집의 인상을 결정짓는 콘크리트 마감은 건축주의 아이디어였다. 유씨는 “최대한 단순한 형태에 날것 그대로의 느낌을 원했다"며 “콘크리트는 다른 재료에 비해 관리가 덜 필요하고 세월과 함께 낡아도 그 나름의 멋이 있다"고 했다. 그렇게 완성된 본채 살림집과 별채 공방은 서로 어울리면서도 각각이 어색하거나 부족한 구석 없이 담백했다. 멋 부린 데가 없어서 오히려 멋이 있다고 할까.
집의 얼굴이 되는 하이라이트는 있기 마련. 두 건물 사이에 자리 잡은 자두나무가 그렇다. 공방과 살림집의 중간에 수령이 20~30년인 고목 한 그루가 툭 솟게 한 건 부부의 요구로 건축가가 섬세하게 조율한 디자인이다.
“고목의 제자리를 지켜달라는 게 건축주의 한결같은 요구 사항이었어요. 설계하면서 가장 고심해서 들여다본 요소였죠. 자두나무를 집으로 들이면서 그 지점을 기준으로 건물을 배치하고 바닥면도 나무를 기준 삼아 진입부와의 단차를 뒀어요. 공사 과정에서 감내해야 할 부분이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자두나무를 기점으로 외부와 내부 동선이 교차하는 재밌는 동선이 만들어졌죠."
■마음껏 매만질 수 있는 공간
무심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내부는 정연하고 따뜻하다. 살림집의 내부 벽과 천장도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해 통일감을 주면서 가운데 아담한 중정을 만들었다. 현관 오른쪽에는 거실과 다이닝 공간이 하나로 이어지고 반대편으로 차례차례 방과 욕실이 자리한다. 서 소장은 “집은 중정을 ‘ㅁ' 자로 빙 둘러싼 구조"라며 “콘크리트 마감재 때문에 다소 삭막한 느낌이 날 수 있는데 중정이 실내에 빛과 바람을 들이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독특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를 내는 살구색 계열 바닥도 인상적이다. “페인트를 칠한 에폭시 마감재는 주로 상업용 공간에 쓰는데 노출 콘크리트 마감재와 합이 좋아 제안했어요. 디자인적 장치가 거의 없다시피 한 집이니 마감재만큼은 과감하게 써봤는데 좋은 포인트가 된 것 같습니다."
내부 공간의 또 다른 묘미는 유씨가 목공방에서 손수 제작한 가구들이다. 가로로 널찍한 다이닝 공간에는 3m 길이 통나무로 짠 식탁과 의자가 놓였고, 곳곳엔 소담한 나무 협탁과 소품이 자리했다. 남편이 이 집을 지은 이유와 목적이기도 한 가구들이다. “필요한 가구는 다 만들어요. 직접 만든 가구들이니 집과도 잘 어울리죠. 집도 가구도 멋있고 화려한 건 싫습니다.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게 좋아요."
종일 부드러운 빛이 감돌고 남편이 매만진 나무 가구가 온기를 발하는 공간 안팎을 오가며 아내는 식물을 가꾼다. 직접 땅을 갈고 화초를 심은 정원이 한눈에 담기는 다이닝 공간은 아내가 편애하는 공간이다. “모든 공간이 좋지만 식탁에 앉아 풍경을 보면서 앉아만 있어도 마음이 충만해져요. 문득 이런 점은 참 좋네, 이런 고민은 참 고맙네, 하는 마음을 가질 때가 많아요."
살림집을 마주 보는 별채는 철저히 목공 작업의 편의에 맞춘 공방으로 계획했다. 20년간 주말에만 취미로 목공을 해온 유씨는 매일 눈을 뜨면 공방으로 향한다. 각종 목공 장비가 가득한 작업실과 화장실을 갖춘 공방은 둥근 천창이 있어 온종일 기분 좋은 빛이 일렁인다.
■느리고 자적한 삶을 위해
두 자녀와 복닥거리며 평생 도시에서 살다 부부만의 자적한 삶을 살기로 마음먹고 전원에 당도한 부부는 어느 때보다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집 짓기 자체도 로망이지만 완성에는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는 부부의 말대로 서가에서는 그 손길의 정성과 디테일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었다.
우선 정원. 아내는 이사 오면서부터 남편과 함께 200평대 앞마당을 갈아엎기 시작해 일정한 주기를 두고 반복해서 작업하고 있다. 시간이 돈인 요즘의 세태와 맞지 않지만 부부는 조바심을 내지 않고 1년 가까이 정원의 기초 작업을 묵묵하게 하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흙을 파고 지렁이가 있지 않나 살피는 순간이 정말 즐거워요. 전문가에게 맡기면 쉽게 아름다운 정원을 누릴 수 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요. 계절의 마디마디를 천천히 느끼며 하나뿐인 정원을 만들어가고 싶어요."
남편의 시간도 아내의 정원처럼 단단히 다져지고 있다. 최상의 나무와 디자인을 찾기 위해 애쓰는 하루하루가 쌓이면서 가구 모양새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유씨는 얼마 전 ‘알우드 공방'이라는 이름을 걸고 가구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남편의 말.
“주말만 기다리며 해오던 취미 생활을 매일 할 수 있으니 얼마나 호사인가요. 앞으로도 쉼 없이 작업하고 내가 만든 아름다움을 주변과 나누고 싶어요." 자신을 닮은 집을 지은 덕분에 새롭게 채워지는 인생 2막. 결국 집은 인생을 어떤 속도로, 어떤 방식으로 살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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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손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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