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케스트라로 ‘느림의 미학’을 들려주었던 숨겨진 거장 Sergiu Celibidache에 관하여
클래식 음악의 '지휘자' 중 생각나는 사람이 누가 있냐고 갑자기 물어 본다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Karajan, 또는 Bernstein..., 아니면 Abbado?... 그도 아니면 정명훈...
등을 얘기 할 것이다. 그렇게 클래식 음악에 대한 관심이 1도 없는 이들에게도 지휘자라고 하면 먼저 떠올려지는 인물들이 있다. 그런데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당연히 실력도 실력이겠지만 아마도 메이저 음반사를 통한 그들의 레코딩 들 이 엄청나게 많은 것도 그 이유 중 하나 일 것이다.
그에 반해 오늘 알아볼 Sergiu Celibidache (세르주 첼리비다케)는 어떤가? 그가 클래식 음악 지휘계의 거장중 하나로 인정받는 인물임을 인지하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그가 클래식 음악계에 차지하는 높은 위치에 비해
이처럼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과연 또 무엇인가..?
아마도 그건 그가 생전에 레코딩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지휘자로서의 역량은 그가 말년 의 대부분 (1979년을 시작으로 90년대 초반까지 재임)을 함께했던 뮌헨 필하모닉의 공연을 다녀왔던 많은 이들의 뇌리에만 남아 있을 뿐, 1996년 그의 사후 봇물처럼 터져나왔던 그의 공개되지 않았던 레코딩 들 이 음반 화 되기 전에는 클래식 업계에서 아는 사람들만 아는 그저 입 소문 으로 전해지는 '신화'와 같은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의 활동 초기에 모노로 녹음 된 레코딩 들이 발표된 적은 있지만 음질의 열악함도 그렇지만 말년의 그의 철학이 모두 반영된 진정한 Sergiu Celibidache (세르주 첼리비다케)의 음악 세계가 온전히 덧 입혀진 레코딩 들 은 그의 생전에는 세상에 발표 되어 지질 않았던 것이다.
1912년 루마니아 태생인 첼리비다케는 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그때나 지금이나 세계 최고로 여겨지던 베를린 필을 지휘하면서 지휘자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정말 운이 좋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 종전과 더불어 독일에 남아서 활동했던 지휘자들은 나치에 협력했다는 혐의로 줄줄이 연합국에 의해 연주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때 오케스트라를 재건하여 연주 활동을 이어가고자 했던 베를린 필하모닉은 단원 중 한 사람이 첼리비다케라는 젊은 합창 지휘자를 추천했고 아마추어 합창단 이외에는 지휘 경력이 전무했던 셀리비다케 였지만 베를린 필은 당장 일정에 잡힌 연주회 들을 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그에게 베를린 필을 지휘할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다.
젊은 첼리비다케의 지휘는 베를린 청중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고, 이후 1947년 5월 푸르트벵글러가 복귀할 때까지 베를린 필을 사실상 이끌게 되었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는 건강 문제와 작곡 때문에 복귀 이후에도 베를린 필 과 많은 연주 회를 가지지는 못했고 첼리비다케 가 여전히 베를린 필을 자주 지휘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모두가 바라는 헤피엔딩 은 이뤄지지 않았다!
첼리비다케는 단원들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았고 걸핏하면 베를린 필 단원들의 실력이
형편없어서 전부 물갈이 해야 한다고 비난하기 일쑤여서 교향악단 멤버들과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1954년 푸르트벵글러가 결국 사망하게 되었고 불과 두 달 후에
미국 순회 공연이라는 큰 행사를 앞두고 있던 베를린 필은 당장 새로 상임 지휘자를 뽑아야 했고 이때 선택된 이가 바로 카라얀 이었다.
이후 유럽 여러 곳에서 객원 지휘자 생활을 했던 그는 1971년 슈투트가르트 방송
교향악단에 취임했다(1971–1977). 이를 계기로 서독으로 활동 영역이 옮겨지게 되었고
1979년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다.
선불교 사상을 20대 시절부터 깊이 자신의 철학으로 가지고 있던 그는 모든 연주가 그 연주 장소에 모인 모든 인원들과 함께 일회성을 가지고 그 연주 후에는 사라지는 것을 추구하였기에 그의 사후에도 음반을 내지 말아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첼리비다케의 아들의 주도로 기록 용으로 녹음해 놓은 음원들이 음반 화 되었다.
첼리비다케가 뮌헨 필을 맡기 전에 많은 방송 교향 악단들과 일했다는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어서 덕분에 음반 녹음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녹음이 현존하고 있다.
뮌헨 필 역시 바이에른 방송국이 모든 연주를 녹음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점에서 방송 교향악단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 점이 결정적으로 음악 애호가들이 지금 그의 연주를 레코딩 으로 들을 수 있게 된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당시 첼리비다케 음원 판권을 두고 메이저 음반사들의 입찰 전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결국 입찰 전에서 승리한 EMI에서 엄청난 양의 음반이 쏟아져 나왔다.
유력한 경쟁자였지만 입찰에서 탈락한 DG는 첼리비다케가 뮌헨 필 이전에 맡았던
슈투트가르트 방송 교향악단, 스웨덴 방송 교향악단 등의 음원을 음반 화 시켰다.
그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에 대한 혹독한 트레이닝과 독설들은 모두 그의 완벽 주의의
부산물일 수 있어 비난의 대상까지는 아닐 수 있겠지만 그의 말년을 10년 넘게 힘들게 했던 여성 트럼본 주자인 에비 코넌트(Abbie Conant)와의 성차별에 관한 법정 싸움... 그리고 그 싸움 에서 의 패소는 그를 그의 여성 혐오(?), 내지는 구시대적 여성 관에 대한 비난에서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동료 유명 지휘자들에 대한 원색적인 독설 들은 “굳이, 왜?”라는
물음과 함께 그의 인격에 대한 의문까지 들게 할 수 있다! 이렇듯 한 부분에 특화된
예술가들이 다른 부분에 허당인 면을 노출 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기는 하다!
어쨌든 필자에게 있어 Sergiu Celibidache (세르주 첼리비다케)는 그를 알기 이전과 이후가 명백히 갈릴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Tchaikovsky 교향곡 5번 2악장 Andanta Cantabile는 그 어떤 다른 레코딩도 흉내 낼 수 없는 깊이와 음악성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Brahms 교향곡 2번 2 악장, 그리고 Beethoven 교향곡 9번 3 악장 등도 셀리비다케의 '느림의 미학'이 완벽히 구현된 명연 이다! 그의 연주의 특징은 한음 한음 신중하게 매우 느리게 연주되지만 마치 오케스트라가 노래 하는 듯 액센트가 적절히 있고 리듬감 이 살아 있다 는 점이다!
그를 알게 된 것이 너무 도 기쁜 저녁이다!
<
박기한 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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