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각국 지도자들 잇따라 애도 성명
▶ ‘극과 극’ 평가, 사후에도 찬사·비난 갈려…칠레 군사쿠데타 지원 등 오랫동안 논란
1972년 5월29일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의 헨리 키신저(오른쪽부터)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모습. [로이터]
미국 외교계의 거목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 지난달 29일 100세를 일기로 별세하자 미국 전직 대통령을 포함한 세계 각계 인사들의 추모가 잇따랐다.
AP통신 등에 따르면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미국이 외교 문제에서 가장 신뢰할 만하며 뛰어난 목소리 가운데 하나를 잃었다”며 애도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키신저 전 장관에 대해 “어린 유대계 소년으로 나치를 피해 달아나 미군에서 그들(나치)에 맞서 싸운 남자를 오랫동안 존경해왔다”며 “난민이었던 그가 나중에 국무장관에 임명된 것은 미국의 위대함만큼이나 그의 위대함을 드러낸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부시 전 대통령은 “그는 대통령 2명(리처드 닉슨과 제럴드 포드)의 행정부에서 일했고 많이 조언했다”며 “그 봉사와 충고에도 감사하지만 가장 고마운 것은 우정”이라고 덧붙였다.
트럼프 전 행정부에서 일한 마이크 폼페이오 전 국무장관은 키신저 전 장관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그를 추모했다. 폼페이오 전 장관은 소셜미디어 엑스(X· 옛 트위터)에 “장관 재임 기간 그가 건넨 품위 있는 조언과 도움에 항상 감사할 것”이라며 “그는 항상 힘이 되고 해박하기에 매번 대화하고 나면 그의 지혜로 나는 더 준비되고 나아졌다”고 썼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도 소셜미디어에서 “대서양을 넘어 미국과 독일의 우정을 위한 그의 헌신은 매우 컸고 그는 항상 조국 독일과 가까이 있을 것”이라며 “세계가 특별한 외교관을 잃었다”고 추모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1923년 독일에서 태어나 15세가 되던 해인 1938년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키신저 전 장관의 업적에 대해 “미국과 중국의 외교관계 정상화를 포함해 지역(아시아) 평화와 안정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또 셰펑 주미 중국대사는 엑스에 올린 글에서 “키신저 박사가 100세에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충격을 받았고 슬프다”며 “우리 국가들과 세계 모두에 커다란 손실”이라고 적었다. 이어 “역사는 그가 미중 관계에 기여한 것을 기억할 것”이라며 “그는 중국인들의 마음 속에 가장 소중한 오랜 친구로 항상 남아 있을 것”이라고 했다.
키신저 전 장관이 1970년대 냉전 분위기에서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성사시키는 등 1979년 미중 수교에 공이 컸다는 점을 부각한 표현이다. 닉슨 전 대통령의 딸인 트리샤 닉슨과 줄리 닉슨도 “미국의 가장 노련한 외교관 중 한명이 별세한 데 대해 깊은 애도를 표한다”며 키신저 전 장관이 냉전 종식에 큰 역할을 했다고 짚었다.
이밖에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은 키신저 전 장관을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유명 인사 중 한명”이라고 극찬한 뒤 키신저 전 장관의 유산이 수십년, 심지어 수세기 동안 세계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강조했다.
반면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일각에서는 키신저 전 장관에 대한 비판이 나왔다. ‘롤링스톤’은 인터넷판에 실은 부고 기사에 “미국 지배층에 사랑받은 전쟁 범죄자인 헨리 키신저가 마침내 죽었다”고 썼다.
뉴욕타임스(NYT)는 키신저 전 장관이 과거 전 세계적으로 죽음과 전쟁을 초래한 외교정책을 옹호했다는 비난이 엑스에서 많았다고 전했다. NBC 뉴스에 따르면 소셜미디어에서는 베트남전 당시 미국의 캄보디아 폭격 책임이 키신저 전 장관에게 있다는 반응도 나왔다. 키신저 전 장관은 베트남전 종식 노력으로 1973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반전단체나 인권단체 등으로부터 ‘전범’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키신저는 평생 미국의 국익을 위해 ’레알폴리티크(Realpolitik)‘로 불리는 현실주의 외교정책을 추구하면서 부도덕하다는 비판을 받아왔다고 외신은 설명했다. 그는 1971년 중국 방문을 통해 미·중 수교의 토대를 마련하는 등 데탕트를 통해 냉전 위기를 완화했다. 또 1973년 4차 중동전쟁 때 이스라엘과 이집트 등 아랍국가를 오가는 중재 외교로 ’셔틀 외교‘라는 말을 탄생시키며 종전에 기여했다.
하지만 베트남전에서 북베트남의 군대·물자에 타격을 주기 위해 중립국이었던 캄보디아를 비밀리에 폭격해 최소한 5만명의 민간인 사망을 초래했다. 이후 캄보디아에서 폴 포트 정권의 집권과 ’킬링필드‘로 이어지는 단초를 마련한 것도 그였다고 NYT는 지적했다.
1973년 칠레에서 사회주의자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의 정부를 무너뜨린 유혈 군사 쿠데타를 지원했으며,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이 수많은 반대자를 학살한 이른바 ’더러운 전쟁‘을 외면했다는 비난도 받아야 했다. 그 결과 그는 이들 군사정권 하에서 빚어진 인권 침해·살상 행위와 관련된 재판의 수사 대상이 되기도 했다.
키신저는 1977년 국무장관직에서 물러난 뒤 컬럼비아대 석좌교수 제안을 받았지만, 학생들의 반대 시위로 임명이 불발됐다.
그러나 이런 논란에도 키신저는 외곬으로 미국 국익만을 추구한 데 대해 끝까지 사과하지 않아 많은 이들을 분노하게 했다고 영국 BBC는 전했다. 그는 자신의 행적에 대해 ”외교정책에서 도덕적 완벽함을 요구하는 나라는 완벽함도 안보도 달성할 수 없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