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해전은 이름만 들어도 열기가 달아오르는 지극히 극적인 해전이다.
시작과 끝이 해전 표준교본으로 인용할 수 없는 비정상과 변칙의 연속이었다. 그런데도 가장 귀중한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래서 우리는 흥분하며 400여년 덧말과 설화를 보태다 보니 사실을 바로보기 어렵게 된 부분이 없지 않다.
그래서 오늘은 한국 이순신 연구의 본산인 해군사관학교의 학설에 따라 왜곡된 오류를 벗겨 보기로 한다.
첫째, 가장 황당한 설정이 적의 선단을 명량의 사납고 거친 소용돌이 물결에 빠뜨려 격파했다는 회오리 전법으로 본국의 국영TV 방송이 역사기획으로 제작 방송한 비디오를 보신 분들이 계실 것이다.
명량은 지리적으로 아주 특이한 해역이어서 하루에 물 흐름의 방향이 네 번이나 동서로 바뀌고 수심이 불과 1.9m 밖에 안 되며 바닥에 암초가 사나운 악어 이빨처럼 돋아난 수역이 있어 빠른 유속에 요란한 물 흐름 소리를 내기 때문에 ‘명량’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따라서 피아간에 선박의 운용이 어려워 수로 안에서 해전을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다음은 명량에 쇠사슬을 걸쳐놓아 적을 물리쳤다는 만화 같은 이야기인데 아마도 충무공 <난중일기>에 전라좌수영 방어용으로 짧은 구간 철쇄 잡아맬 채석 이야기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 명량해전에 거북선 운운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승선 병사를 모집하기도 급급한데 한척 건조에 몇 달은 걸려야할 거북선을 만들고 있다? 필사즉생을 외치신 장군의 초미의 고뇌에 모독이 아닐까 싶다.
그러면 실제 해전은 어느 해역에서 벌어졌을까? 이에 대한 단정적 결론은 관련 학계에서 아직 비정을 하지 못하고 있으나 명량을 완전히 지나 양도섬 바른쪽의 전라 우수영 앞바다일 것이라는 학설이 힘을 얻고 있다. 거친 물결 위에서의 해전은 전선의 운용을 격군의 인력에 의존하던 당시의 여건상 피아가 모두 기피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명량 해전에 참전 대결한 조-일간의 전함비율은 잘 알려진 대로 조선의 판옥선 13척 대 일본의 소형 세끼부네 133척의 혈전 결과 왜군이 31척의 세끼부네를 격파당하고 선봉장 마다시(구루지마 미치후사)가 전사당하자 전의를 잃고 퇴각함으로서 끝이 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면 해전 하루 전 정탐인이 이순신 장군께 보고한 내용은 ‘일본 대소 군선 약 300척이 명량 어구에 다달아 있다’였고 훗날 일본의 전사기록도 이 300척 출동을 확인하고 있는데 어인 일일까? 여기에는 불세출의 명장 이순신의 회심의 전략인 지리전의 진가가 자리하고 있다.
해전 하루 전 훈시에서 장군의 명언 -죽을 각오로 싸우면 오히려 살게 되고, 살고자 꾀를 부리면 오히려 죽게 된다.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잘 지키면 천명의 적군을 당해낼 수 있다-의 길목 지키기가 진가를 발휘한 것이다.
실제 일본 군선 300척은 의기양양하게 명량 입구에 도달하였으나 막상 도착하고 보니 수로의 폭이 너무 좁고 수심이 얕아 아다케와 같은 대형 군선은 진입을 할 수 없어 부득이 소형 세끼부네만 진입시켰다가 완패를 당한 것이다.
이순신 장군께서는 명량의 지리적 특성을 병목현상으로 활용하여 손 하나 안대고 일본 수군 전력의 3분의 2를 무력화시킴으로서 완승을 이룩하셨던 것이다.
꿈같은 명량대첩이 야기하는 커다란 오해는 일본 수군이 패전 이후 명량에 막혀 그 서쪽바다에는 얼씬도 못한 것으로 오인하는 것이다. 일본 수군은 전열을 정비하고 4일 후 명량을 지나 전라우수영을 점거하고 이어서 서해 무안 앞바다까지 북상한 바 있다. 조선 수군이 명량 완승 후 기진한 군졸들의 안전한 휴식과 체력회복을 위해 신속하게 신안 암태도로 숨어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수 읽기의 명장 이순신의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때마침 추위가 몰아치는 동절기에 접어들어 추위에 약한 일본군이 맥을 쓸 수 없고, 목포 앞바다는 무수한 섬이 널려있어 무너진 수군 재건에 박차를 가하기 좋은 여건을 갖춘 데다 명량해전을 치루며 보니 수많은 옛 부하 장졸들이 자진 복귀하여 전투력이 여전함을 확인했던 것이다.
예상대로 일본 수군은 퇴각했고 이순신 수군은 서해안 민심 안정을 위하여 북으로 고군산도까지 유유히 함대를 순항시키는 여유를 보였다.
그러나 싸우면 반드시 이기도록 만전을 기하시는 이순신 장군에게도 명량해전만은 모든 것이 부족한 기약 없는 해전이었다. 그래서 애석하게도 그날의 일기를 ‘참으로 천행이었다’고 맺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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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원 이순신 교육운동가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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