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D 카르텔 현황과 구조조정 과제
▶ 세수 감소 속 문정부 R&D 예산 10조원 급증 도마에…뿌려주기식 지원 벗어나 배분·평가에서 선도형 강화
미국·유럽 등과의 ‘속빈 강정’ 공동연구 내실화 박차, 기초연구예산 감축·과학기술계 사기 저하는 막아야
“1969년 7월 20일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해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이 달 표면을 밟은 순간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올 4월 미국 워싱턴DC 인근의 항공우주국(NASA·나사) 고더드 우주비행센터를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의 말이다. 윤 대통령이 9세 때 흑백TV를 통해 인류 최초의 달 착륙 장면을 생중계로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얘기다. 그는 동행한 미국 국가우주위원장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에게 “(한국도 참여하는) 아르테미스 프로그램이 성공적으로 시작돼 기쁘다”며 “우주항공청 설립에도 나사의 적극적인 조언과 직접적인 인력 교류가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당시 보스턴도 방문해 바이오헬스 육성을 강조했다. 보스턴에는 수많은 글로벌 제약·바이오사와 연구소, 벤처스타트업, 하버드대와 MIT, 우수한 병원 등 ‘산학연병(産學硏病)’이 밀집해 있다. 윤 대통령이 방미길에 연간 60조 원 이상의 예산을 쓰는 세계 최고의 바이오헬스 연구개발(R&D) 지원 기관인 국립보건원(NIH)의 연구소를 방문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우주와 바이오헬스 등 미래 성장 동력의 현장을 본 것은 의미가 컸다. 올 1월 세계경제포럼(WEF) 참석차 스위스를 방문했을 때 취리히연방공대를 찾아 경제와 국방의 판도를 바꿀 게임체인저로 꼽히는 양자 분야 석학들과 만난 것도 마찬가지였다.
윤 대통령이 지난달 ‘제1회 세계 한인 과학기술인 대회’에서 “정부의 R&D 투자는 세계 최고 수준 연구에 투입돼야 한다”며 선도형 연구와 국제 공동 R&D를 강조한 데도 이 같은 배경이 깔려 있다. 그는 “젊은 과학자들이 세계 최고의 연구진과 뛰어난 연구 기관에서 함께 연구하고 도전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할 것”이라고 했다.
기존 R&D 체계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드러내며 경쟁형 R&D 체계로의 대전환을 주문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 R&D 예산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비중이 이스라엘과 함께 세계 1·2위를 다투고 국가 R&D 총액은 세계 5위에 이르지만 연구 생태계는 여전히 ‘패스트 팔로어’에서 ‘퍼스트 무버’로 전환하지 못하는 현실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은 6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 먹기식, 갈라 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R&D계를 ‘이권 카르텔’의 하나로 지목했다.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나눠 먹기식 R&D 체계를 개편해 과학기술 혁신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R&D 체계 개편론은 문재인 정부에서 대학, 정부 출연 연구원, 기업 등에 지원하는 R&D 예산이 약 10조 원이나 급증했으나 그만큼 성과가 나오지 않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올 상반기 국세·지방세 수입이 전년 동기보다 각각 40조 원, 6조 원 가까이 감소한 상황에서 R&D 예산의 구조 조정을 통해 전(前) 정권과 차별화를 꾀하겠다는 의지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R&D 카르텔을 혁파해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에서 반도체·배터리·바이오헬스·우주항공·양자 등 미래 전략 기술을 강화하고 글로벌 신진 연구자를 키워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 R&D 예산은 2008년 10조 원에서 11년 만인 2019년 20조 원대가 됐는데 이후 불과 4년 만에 30조 원대까지 급증했다. 국민의힘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들과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16일 ‘정부 R&D 비효율 혁파 대책 회의’를 갖고 전 정부 R&D 예산 급증 과정에서 카르텔적 요소가 생겼다고 지적했다. 2021년 R&D 과제가 7만 5000개까지 증가하는 과정에서 관리 허점과 사각지대가 발생했다고 꼬집었다.
이어 그 과정에서 임자가 정해져 있는 경우나 기업 보조금 성격, 경쟁 없이 가져가는 뿌려주기식 R&D가 늘었다고 비판했다. 국민의힘 과방위 간사인 박성중 의원은 “여러 R&D 시스템 부실, 온정주의 평가, R&D 전반의 비효율까지 더해져 카르텔로 볼 수 있는 사례가 많이 나타났다”며 “한 번 늘어난 예산이 기득권처럼 작용해 지속되며 비효율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이 장관도 “특정 집단에 의해 기획된 과제나 뿌려주기식 과제, 경쟁력이 낮은 과제 등이 양산되며 연구 현장에서는 도전적 혁신적 R&D가 빛을 잃어가는 부작용이 발생했다”며 “R&D 예산이 중소기업의 연명 수단으로 전락한 사례도 있다”고 거들었다.
다만 과학기술계에서는 전 정부의 R&D 예산 급증 과정에서 소재·부품·장비와 감염병 R&D를 단기 현안 R&D로 분류해 각각 2.7배, 3배 늘어난 것에 부정적 입장으로만 접근한 것은 소부장과 바이오헬스 경쟁력 강화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항변한다. 전 정부에서 중소기업 R&D 사업이 2배 증가했다며 뿌려주기가 늘었다고 비판한 것 또한 코로나19 국면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는 반론도 있다.
익명을 원한 과학기술계 인사는 “R&D 예산 급증에 맞춰 소부장이나 감염병 예산이 제대로 심의가 이뤄지지 않고 집행된 측면이 있다”며 “그렇다고 R&D계까지 카르텔로 묶어 과학기술인의 사기를 꺾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날 당정 회의 뒤 박 의원이 밝힌 ‘R&D 부적정 수행 사례’에서는 역대 정권을 떠나 좀비 기업 양산 등 R&D계의 고질병으로 지적된 문제들이 다시 거론됐다. 우선 R&D 브로커가 역량이 미약한 기업의 연구 계획서를 대필해 사업을 수주하도록 하는 사례가 적지 않지만 제재를 거의 받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 중소 제조 기업의 경우 브로커에게 연구 과제의 20%를 주는 조건으로 서류 작성을 맡겨 1억 원을 따냈다. 이런 업무를 하는 컨설팅사는 포털 사이트나 페이스북 광고만 봐도 흔히 찾을 수 있다.
그렇지만 중소벤처기업부는 2017년부터 2022년 8월까지 40건의 정책 자금 브로커 신고가 들어왔으나 3건만 단순 주의를 줬다. 결국 부처·기관·브로커·기업 등이 공생하는 카르텔이 형성돼 있다는 것이다. 국민의힘 과학기술특별위원회는 “기획·과제 관리업으로 등록된 컨설팅사가 647개가 넘는데 전문성이 미흡한 소규모 업체(5인 이하) 비율이 42%에 달했다”고 밝혔다. 정우성 국민의힘 과기특위원장(포항공대 교수)은 “사각지대에 숨겨진 브로커들이 굉장히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당정은 기업이 정부 R&D 자금을 생존 자금으로 쓰거나 비슷한 연구 주제로 여러 과제를 동시에 수행하는 사례도 제시했다. 중소기업연구원에 따르면 2015~2019년 1250만~1500만 원의 소액 R&D 자금을 중복 지원받은 기업이 15회 이상 106개, 11~14회 335개에 달했다. ‘북 치고 장구 치고’ 식으로 연구 과제를 기획한 곳이 직접 연구를 수행하기도 했다. 모 협회가 소규모 건축물 에너지 최적화 기술 과제를 기획하고 주관 연구 기관까지 맡은 사례도 있다. 출연연의 도덕적 해이도 다시 도마에 올랐다. 기계연구원에서 2014년부터 6년간 기술사업화실장과 변리사가 짜고 특허등록 226건의 허위 서류를 만들어 67억 원을 횡령한 사건이 재소환됐다. 100여 개로 늘어난 출연연 지역 분원도 정치인과 연구계의 카르텔로 지목됐다.
윤 대통령과 당정이 R&D 카르텔 타파를 외치면서 과학기술계는 벌집을 쑤셔놓은 듯한 분위기이다. 우선 정부 출연 연구원들은 기획재정부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내년 연구 예산 중 평균 28~30%에 달하는 감축안을 과기정통부에 제출했다. 국가 전략 기술인 바이오헬스를 다루는 생명과학연구원이나 우주항공을 개척하는 항공우주연구원도 칼날을 피해가지 못했다.
익명을 원한 출연연 원장은 “일률적인 예산 감축으로 출연연 분위기가 침체돼 있다. 내년에는 연구 과제도 좀 줄이고 비상 체제로 조직을 운영할 수밖에 없다”며 “과기정통부 산하 25개 출연연의 PBS(연구 과제 수주 시스템) 비중이 평균 절반가량으로 이것을 줄여야 하는 게 숙제로 지적돼왔는데 오히려 늘어나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연구원들이 인건비 등을 벌충하기 위해 정부와 공공 기관, 기업에서 R&D 과제를 수주하는 데 내몰려 출연연 본연의 연구에 소홀하다는 지적이 많았는데 외려 이런 현상을 증폭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계에서는 미래 전략 기술을 강화한다면서 출연연의 연구 예산을 총 3000억 원가량 감축하는 것도 되돌아봐야 한다는 하소연을 내놓는다. 바이오생명과학을 연구하는 한 KAIST 교수는 “기초연구 예산도 유탄을 맞아 2000억 원가량 감소될 것 같다”며 “연구실에서 불요불급한 예산을 줄이고 긴축 경영을 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국제 R&D 협력의 경우에도 우리 연구 기관이나 지원 기관, 대학에서 해외 유수 연구소와 협력을 진행할 때 보여주기식이 많은 현실에서 예산 낭비가 없도록 해야 한다는 조언이 나온다. 현재 전체 연구 과제의 0.4%밖에 되지 않는 국제 공동 연구 과제를 대폭 늘리는 것은 맞지만 내실을 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NIH의 주요 연구소 중 하나인 국립심폐혈액연구소(NHLBI)에서 30년 가까이 근무한 한 박사는 “한국에서 NIH와 R&D 협력 및 인력 교류를 원하지만 잘 이뤄지지는 않는다”며 “한국은 기관장이 양해각서(MOU)를 맺는 데 급급하고 기관장이 바뀌면 없었던 일이 된다”고 꼬집었다.
이 장관은 “보조금 성격의 사업, 뿌려주기식 R&D 사업은 과감히 구조 조정하고 예산 배분과 평가에서 혁신을 병행할 것”이라며 “외국의 잘하는 곳들과 집중적으로 협력 연구를 하고 학생도 보낼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정부 부처·기관과 출연연, 대학 등이 칸막이 속에서 안주하는 분위기를 없애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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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본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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