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절간에 좀 다녔다. 교회 가서 어쩌다 그런 얘기를 하게 되면 반응이 1) 마귀 만난 듯 표정 변하거나 2) 고시공부 했느냐 인생사 궁금해 하거나 3) 절밥 맛있더라, 어색하게 맞장구치거나 그중에 하나다.
1번, 2번은 나도 관심 없고 3번 절밥 맛있다는 반응은 그런대로 종교적 관용을 시사하니 우호적으로 담화를 더 나눌 수 있을 법도 한데 그게 그렇지가 않다. 왜? 절밥은 맛이 없으니까. 동의하지 않을 분 많다는 것 아는데 그래도 맛이 없어야 절밥이다.
절이 밥 먹으러 가는 데냐. 막말로 ‘빌어먹는’ 스님들이 먹는 걸로 요사 떨어서는 아니된다는 교조주의가 내 속에 있다는 것, 인정한다. 어쨌든 템플 스테이까지는 좋은데 사찰음식 강조하고 거기에 전통이다 뭐다 그런 양념까지 얹으려 들면 확 두드러기 돋는다.
그러니까 절밥은 맛이 있으면 안된다는 게 내 주장인데… 인간이 간사하게도 이런 말 하면서 입에 침이 도는 절밥 반찬 하나가 늘 생각나니 그건 바로 애호박볶음이다. 새우젓이 들어가야 제맛이라니 정확하게 말하면 절밥은 아니고 사하촌의 별식이겠다.
80년 그 어수선하던 여름, 그 한자락을 머리 식힐 겸 수안보에서 더 들어가 미륵리 산 깊은 절간에서 보냈다. 번듯한 절은 아니고 폐사터 한 귀퉁이의 작은 집에서 비구니 스님이 부처님을 모시고 마을 빈집에 학생들을 받아 밥만 절에서 먹이는 일종의 하숙이었다. 그러니까 절밥이라기 보다 그냥 시골 밥상인 것이다.
산골의 찬이라는 게 그렇다. 이것저것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로 보살님이 정성을 다하셨는데 그래도 정성이 괴기맛을 이길 수는 없고, 내 나이가 또 그럴 입맛의 나이였다. 그런데 애호박볶음 만큼은 환장하게 맛있었다.
깨소금, 들기름맛이었을까. 하여튼 그 맛을 잊지 못해 가끔 아내에게 타령을 하고는 한다. 아, 내가 음식 투정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 맛없다는 소리는 하지 않고 대신 맛있는 것들을 줄줄 읊을 때는 있다.
그렇기에 여기 히스패닉 채소 코너에서 피피안(pipian)을 봤을 때 그 반가움이란 흥남부두에서 손 놓친 금순이를 국제시장 국밥집에서 재회하는 기쁨이었다. 애호박 하고 많이도 닮았다.
우리가 서양호박, 조선호박 구분해 부르는 호박들이 죄다 중남미가 원산이다. 그중 피피안만큼은 다른 곳으로 퍼져나가지 않았다고 한다(호박씨로 만든 멕시코 소스도 피피안이라 불린다.).
피피안은 엘살바도르를 위시한 센트럴 아메리카에서 특히 더 사랑받는데 우리의 애호박이 그러하듯이 완전히 여물기 전에 따서 먹는다. 일부 완전히 익혀서 따는 건 다음 번에 뿌릴 씨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호떡 같은 모양의 푸푸사 속에 넣기도 하고 으깨거나 국에 넣는 등 다양하게 쓰이는 채소다.
흥미롭기는, 이 피피안을 팔려고 찾아온 미국 교수가 있었다. 그것도 멀리, 차로 8시간은 달려야 하는 매사추세츠에서. 십 년도 훨씬 전이라 그때는 자세한 내막을 몰랐는데 매사추세츠 주립대 앰허스트 농과대학(UMass: University of Massachusetts Amherst)이다. 그곳 농장에서 이민자들이 못 잊어 하는 고향의 맛이 상업재배가 가능한가 실험하고 연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대학의 전신이 매사추세츠 농과대학이다! 그래서?
“Boys, be ambitious”의 바로 그 윌리암 클라크 학장이 동네 유지들을 설득해서 세운 미국 최초의 농과대학인 것이다. 그걸 모델로 클라크를 초청한 곳이 홋카이도 농과대학이고, 서울농대의 전신인 수원농림을 비롯해서 일제 강점기 조선 곳곳에 세워진 농림학교들에 그 맥이 닿아 있다. 식민지 수탈체계라고 부를지 탈봉건 근대화라고 부를지 그런 역사논쟁은 내가 감히 말 얹을 수 없는 영역이고.
신기한 일이기는 한데, 멀고도 먼 중남미 어느 마을 텃밭에서 나서 세상을 돌고 돌아 조선땅에 씨앗 뿌려진 호박, 그렇게 만든 애호박볶음이 ‘한국인의 밥상’에 올라온다는 것, 그것이 더 놀라운 일이긴 하지.
우리것이 좋은 것이여… 그래 말인 즉 다 좋은데 어디까지가 우리 것인지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겠는 게 소위 ‘우리 것’이다. 남들과 구별하려고 우리 것 찾기 보다 내것 네것 합쳐 우리 것 만들어 가는 게 먼저 아닐까. 좋은 걸 우리 걸로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
마켓에 아직 피피안이 보이기에 새우젓 넣어 볶아 봤다. 조선 애호박 맛이 나는지는 기억이 오래여서인지 잘 모르겠다. 먹을 만은 하다.
매달 둘째 주와 넷째 주 화요일 교육섹션에 정재욱 씨의 글을 연재한다. 소소하지만 공감이 가는 일상과 삶의 현장에서 보고 느낀 생생한 경험들을 독자들과 나눈다. 이 글 시리즈의 현판 ‘워싱턴 촌뜨기’는 미국의 수도에 살고는 있으나 여전히 낯설기만 한 ‘촌뜨기 신세’라는 작가의 뜻에 따라 붙였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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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욱 / 전 언론인,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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