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8월15일은 조국 광복 78주년, 대한민국 건국 75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 날을 맞이하면서 조국의 광복과 대한민국의 건국에 얼마의 공헌을 하신 아버지 백관수와의 만남과 그의 잊지 못할 모습이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1939년 아버지의 ‘쉰둥이’(아버지 나이 50세)로 태어나 1950년 6.25동란때 납북으로 아버지와의 마지막 이별을 하였으니 아버지와의 만남은 11년인 셈이다. 그 11년의 만남에서 기억에 남는 아버지와의 만남과 잊지 못할 그의 모습은 넷이다.
1 투쟁하는 혁명가의 모습
아버지와의 잊지 못할 첫째 만남은 내 나이 6세인 1945년 12월 18일 저녁 수류탄 폭탄이 터지고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및 몇몇 친지와 해방정국 모임을 하시던 원남동 사랑방에서 안방으로 들어오시면서 “나쁜 놈들”이라고 큰 소리로 야단을 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그 모습에서 얼마전에 아버지로 부터 직접 들은,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 YMCA 회관에서 ‘2.8독립선언서’를 낭독 선포하신 혁명가의 모습을 연상하였다.
특히 2.8독립선언서의 결의문은 ‘일본의회와 정부에 조선민족대회를 소집하여 대회의 결의로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기회를 부여하기을 요구함’과 ‘앞항의 요구가 실패할 때에는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을 선언함’을 명문화하여 실천적이며 투쟁적인 민족주의의 면모를 보여 주고 있어, 아버지는 투쟁하는 혁명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2 충절한 언론인의 모습
잊히지 않는 아버지와의 둘째 만남은 내 나이 8세로 1947년 어느 날 저녁 밥상을 물린 후 10살 위인 형님과 함께 훈계를 하시면서, 1940년 동아일보 폐간 당시 조선총독부의 자진 폐간에 항거하시면서 충절을 지키시었다고 훈계하시던 모습이다.
1936년 손기정의 베를린 올림픽 일장기 말살 사건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동아일보의 사장으로 1937년에 취임하였다. 1940년 조선총독부는 신문사 정리 차원에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게 자진 폐간을 강요하여 왔다. 아버지는 자진 폐간을 절대 반대하였고, 총독부는 임시 중역회의를 열어 발행인과 편집인을 바꾸어 폐간계를 내게 하여 폐간되었다.
아버지는 마지막 간부회의에서 “여러분 우리는 사중구생합시다. 죽음곳에서 생을 구합시다”라는 마지막 말씀과 그의 한시 ‘위 우러러 부끄럽지 않음이여/밑 굽어 보아도 부끄럽지 않음이여/굽어보든 우러러 보든 부끄럼이 없으니/무슨 뉘우칠 일 있으리오’ 구절에서 충절을 보여 준 언론인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3 비전있는 정치인의 모습
아버지와의 잊히지 않는 셋째 만남은 1948년 내 나이 9살, 국민학교 3학년때 1948년 5.10 선거로 제헌국회의원으로 정치일 하시는 아버지가 가끔 지프로 학교 교문까지 라이드를 주실 때마다 정직하고 꿈을 가지라고 웃음으로 말씀하시던 모습이다. 아버지 본인이 대한민국의 앞날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으신 정치인임을 드러내는 모습인 것이리라.
아버지는 제헌국회의원, 법제사법위원장, 헌법기초위원 등 대한민국의 건국에 일익을 담당하였던 비전있는 정치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음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정치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깊이가 있고 저력이 있어야 합니다.”라는 말씀과 “그러기 위해서는 책임을 골고루 가지고 항시 국민의 심판을 받는 내각책임제가 바람직하다고 봅니다”라는 주장이 그의 비전을 보여 주고 있다.
4 지사인 민족주의자의 모습
넷째 아니 마지막 잊지 못할 만남은 6.25전쟁 발발후 1950년 6월 27일 피신하시었던 시흥에서 “잠시 다녀 오겠다”로 서울로 떠나실 때에, 아버지의 마지막 얼굴 표정에서 전쟁 중이지만 무엇인가를 한국 민족을 위하여 하시겠다는 지사다운 민족주의자의 모습을 보는 듯하였다.
이태호의 ‘압록강변의 겨울’ 제목의 책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가 납북되신 후 1956년 납북인사들로 결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참여하시었지만 그 회가 점점 북한당국에 이용당하는 상황을 터득하고 김일성에게 반발한 상황을 설명하였다.
1961년 아버지는 평양북도 선천 폐결핵요양병원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1983년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새마을공원에 선각자 두분을 기념하여 인촌 좌상과 근촌 입상이 고창군민의 손으로 건립되었다.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덕산라 생근리에는 아버지의 생가가 있고 또한 어머니 안준 여사의 손으로 마련된 아버지의 빈 무덤이 아직도 북한 어디엔가 방치되어 있을 아버지의 시신을 기다리고 있다. 아버지의 빈 무덤이 채워지는, 한반도의 분단비극이 끝이 나는 날을 간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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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순 / 전 연방 노동부 선임 경제학자,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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