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셔널 지오그래픽, 냇 지오(Nat Geo)는 명품 잡지였다. 핸드백으로 치면 샤넬 급이었다고나 할까. 허투루 컨텐츠를 내놓지 않았다. 오랜 탐사를 통해 심해와 우주, 알려지지 않았던 지구와 거기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드러냈다. 일반 독자를 이처럼 자연스럽게 자연과 과학의 세계로 이끌고, 인문학의 세계로까지 인도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고품격 사진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위험이 도사린 탐험과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거쳐 장인의 솜씨가 발휘됐을 때 많은 사진은 작품이 됐다. 냇 지오 사진 중에는 지금도 아마존 등에서 팔리고 있는 빈티지 포토들이 있다. 지난 85년 표지 사진으로 쓰였던 ‘아프간 걸’도 그중 하나다. 12살 난민 소녀의 녹색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하고도 신비한 눈빛은 이 한 장으로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사진 판 ‘모나리자’라는 이도 있다.
이런 냇 지오에는 이제 기자(staff writer)가 없다. 잇단 감원의 결과다. 전에 소속 기자들이 하던 일은 편집자(editor)나 외부 프리랜서가 대신한다. 심층 보도의 원천이었던 장기 탐사 계약도 크게 줄었다. 인쇄본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나 내년부터 뉴스 스탠드에서는 볼 수 없다. 한 때 1,200만 부에 이르던 미국내 발행 부수는 180만 부 아래로 떨어졌다. 근 100년 전에 100만 구독자 시대를 열었던 인쇄매체의 현주소다.
무엇이든 역할을 다했으면 쇠락하는 것이 세상 이치다. 변화해 바뀐 환경에 적응하거나, 아니면 퇴장 절차에 들어 간다. 종이 매체를 주장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시대다. 다양한 디지털 플랫폼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창간 135년이 된 냇 지오는 지난 10년새 주인이 두 번 바뀌었다.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을 거쳐 지금은 디즈니가 지분의 70% 이상을 갖고 있다.
디즈니는 컨텐츠 계의 최강자, 냇 지오가 어떻게 바뀌어 나갈지 주목된다. 디즈니로 간 냇 지오에는 ‘외계인’, ‘상어 vs. 참치’ 등의 기획물이 실리기도 했다. 흥미 위주의 엔터테인먼트, 지나친 상업주의에 대한 우려가 있다. 전화 발명가인 그레이엄 벨 등 33인의 학자와 탐험가 등이 넷 지오 창간 동호인이다. 원래는 회원들에게만 배포되던 것이다. 이 교양학술지에는 타협될 수 없는 원칙과 정신이 있었다.
냇 지오 뿐 아니라 많은 고전적 매체가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신문도 그중 하나다. 신문에는 요구되는 역할이 있다. 권력이나 금력의 전횡을 감시하는 것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신문에 정치와 고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관심있는 독자였다면 지난 팬데믹 때 책임 있는 언론의 역할을 엿볼 수 있었을 것이다. 코로나는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 공포의 대상이었다. 짙은 안개 속을 더듬어야 했다. 호흡기 질환이라는데 심장마비로 숨지고, 젊은 여성이 실명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괴질이었다. 조심스럽지만 몇 달 앞서 원인을 파악하고 나름의 진단을 내 놓은 것은 명망 있는 인쇄 매체들이었다. 이른 대비가 가능했다. CDC와 FDA등 보건당국은 그 후에 이를 확인하고 공식화했다. 이런 패턴이 반복된 사례가 많다. 정부기관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자칫 잘못하면 혼란이 걷잡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문의 시대가 갔다고 한다. 맞기도 하지만, 틀린 말이다. 종이 신문의 시대가 갔다면 맞는 말이다. 미국의 양대 신문으로 꼽히는 뉴욕 타임스는 발행 부수가 70여만 부, 워싱턴 포스트는 20만 부가 안된다. 하지만 뉴욕 타임스는 정기 구독자 1,000만 명 시대에 진입했다. 4년 후에는 1,500만 명이 목표라고 한다. 워싱턴 포스트도 정기 구독자가 300만 명을 넘긴 적이 있다. 물론 디지털 구독자 때문이다. 종이 신문 시대에 꿈꿀 수 없던 숫자다.
인터넷 덕분 아니냐고 한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전달 방식만 바꾼 디지털화는 오히려 독이다. 의류업체가 내세울 제품도 없으면서 온라인 판매만 강화한다고 될 일인가. 비용만 더 들고 망하는 길이다. 실체 없이 인터넷에 의존한 업체들은 부지런히 도태되고 있다.
뉴욕 타임스 등이 이처럼 성장한 것은 컨텐츠가 원동력이다. 그 신문만이 가능한 충실한 보도를 내놓고 있다. 신문의 손님들이 원하는 것, 필요한 것을 만들어 제공한다. 공들여 만든 컨텐츠가 디지털이라는 날개를 달았을 뿐이다.
냇 지오도 다르지 않다. 과학이 발전할 수록 탐사가 필요한 영역은 더 넓어진다. 우주만 해도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전체의 4~ 5% 정도라고 하지 않는가. 암흑물질, 암흑에너지 등 탐구 대상은 무궁무진 하다. 자연과 과학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끌어 내 줄 매체의 필요성은 더 커졌다.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시장이 하느님이다. 시장에서 살아남는 자가 진정한 승자인 것이다. 시장이 포장에 속는 것은 처음 한 번이다. 결국은 상품의 질이 좌우한다. ‘껍데기는 가라’는 어느 시대에나 유효한 죽비 소리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냇 지오의 긴축 경영 소식을 들으며 이 문제를 또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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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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