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카파섬에 왔다. 야생화와 갈매기의 천국인 아나카파 섬은 채널 아일랜드의 다섯 개 섬 중 하나로 화산으로 된 무인도다.
수직으로 된 높은 암석 절벽에 158개의 알루미늄 계단이 지그재그로 설치되었다. 아름다운 풍광에 압도되어 힘 드는지도 모르고 섬 위에 올라왔다. 물새들의 배설물로 회색이 된 바위는 안개에 젖어 운치 있어 보인다. 떼를 지어 바다 위를 질서 있게 비행하는 물새들 속에 끼어 나도 팔을 크게 펴면 날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검은 바위 위에 앉아있는 갈매기를 보며 나의 눈을 의심했다.
‘이 새가 내가 아는 갈매기 맞아!’
금세 마음을 빼앗긴 나와는 달리, 하얀 목을 꼿꼿하게 쳐들고 도도하게 나의 시선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나카파의 갈매기는 마치 여왕과도 같은 자태이다. 부리의 핑크색 점, 빛나는 검은 눈, 눈처럼 새하얀 목과 몸통, 진회색의 날개, 검정 꼬리를 열고 닫을 때마다 살짝 내비치는 세련된 흰 무늬의 꼬리 깃. 어느 여왕이 이토록 아름답고 품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갈매기 옆 나무 테이블에 김밥과 떡을 펴놓고 먹으며 그가 다가오리라 생각했다. 우리 동네 레돈도 비치 갈매기라면 분명 덤벼들 것이다. 사람들이 떨어뜨리는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이런 유혹에도 흔들림 없는 그 모습 그대로이다.
‘아! 내가 너무 얕잡아보았구나.’ 저 갈매기는 쉽게 먹이를 찾아 사람들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쓰레기통이나 뒤지는 자존심을 잃은 새가 아니다. 험난한 비행과 바다 속 먹이를 향해 곤두박질치는 자신들의 힘든 생존 방식을 고수하겠다는 의연한 태도이다. 사람들도 쉽게 살려고 변해가는 세상이다. 삶의 원칙과 철학을 지키기 힘들어졌음에도, 아나카파 섬의 갈매기는 그것을 지키며 살아가는 모습이 아름답다. 오늘 나의 삶은 어떤 갈매기인가 생각하게 된다.
아나카파 섬의 갈매기를 보며 리처드 바크(Richard Bach)의 ‘갈매기의 꿈’ 소설에 나오는 갈매기가 떠올랐다. 하찮은 먹이를 구하기 위해 고기잡이배와 해변 사이를 배회하는 갈매기의 삶에서 진정한 자유와 자아실현을 위해 고단한 비상의 꿈을 이루어낸 갈매기의 이야기다. 그는 오랜 관습에 저항하는 것으로 여겨져 다른 갈매기들에게서 따돌림을 받고 무리로부터 추방당했다. 홀로 된 갈매기는 꿋꿋하게 자신의 꿈에 도전하여 ‘먹기 위해서 사는 것과 살기위해서 먹는 것’에는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었고, ‘부지런히 계속 사랑하라.’고 말했다. 소설의 주인공인 조나단 리빙스턴 갈매기처럼 앞날을 내다보며 저마다 마음속에 자신만의 꿈과 이상을 간직하며 살아갈 것을 말해준다.
닐 다이아몬드의 ‘갈매기’노래가 파도를 타고 들려올 것 같은 경사 없이 평탄한 섬, 땅에 찰싹 붙어있는 잡풀로 파란 융단을 깔아놓은 듯이 푹신한 트레일을 걷는다.
알을 품고 앉아있는 어미 갈매기, 평생 함께한다는 부부애를 과시하며 짝지어 걷는 갈매기, 노래하며 짝을 찾는 갈매기, 무리를 지어 바다를 비행하는 갈매기 등 셀 수 없이 많은 갈매기와 갈색의 큰 날개를 펼치고 날고 있는 펠리컨들의 ‘즐거운 우리 집’이다.
섬의 북쪽 끝에 있는 인스피레이션 포인트에는 파란 수평선과 섬 주위에 있는 두세 개의 뾰족한 바위들이 둘러있다. 갈매기들이 그 바위 꼭대기에 앉아서 섬과 바위사이 저 밑 바다에서 자맥질을 하는 물개가족들의 평화로운 모습을 즐기고 있다. 도시 가까운 해안가에 사는 꾀죄죄한 갈매기에게 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여유로움(?)이 있어 보인다.
8자 모양의 트레일의 북쪽에서 남쪽 끝으로 돌아와 1932년에 지어져 지금까지 섬을 지키는 의젓한 등대에 왔다. 안개 경보를 알리는 뿔 나팔이 있다는데 안개가 심하지 않아서인지 뿔 나팔 소리는 듣지 못했다. 푸서릿 길을 걸어 등대 가까이 올라갔지만 접근하지 못하게 해서 아쉽게도 들어가 볼 수 없었다. 아름다운 등대 주위에서 한 무리의 갈매기가 비행 쇼를 열어 우리를 환영한다.
각양각색의 아름다운 야생화와 품격 있는 갈매기들로 아나카파 섬에 찾아온 봄날이다, ‘부지런히 계속 사랑하라’ 리빙스턴 갈매기의 메시지가 지구 촌 멀리 전쟁터와 지진재해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전해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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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화 토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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