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가주에 사는 딸 부부가 지난 메모리얼 데이 연휴 북가주로 여행을 갔다. 오랜만에 직장 일에서 벗어나 머리도 식힐 겸, 샌프란시스코의 친구도 볼 겸 마음먹고 떠난 여행이었다. 호텔이며 식당을 일찌감치 예약하며 4박 5일의 일정을 꼼꼼히 준비했다.
그런데 여행 둘째 날인 금요일 오후부터 문제가 생겼다. 딸이 치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전날부터 간간이 오른쪽 윗니가 아프다 말다 했는데 어느 순간 통증이 견딜 수 없게 심해졌다. 예술가 타운, 카멜의 미슐랭 선정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 딸은 음식을 즐기기는커녕 이가 너무 아파서 앞이 안 보일 정도였다. 낯선 곳에서, 그것도 연휴에 어디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한 상황이었다.
구글로 인근 치과들을 찾아 모두 전화해봤지만 전화를 받는 곳이 없었다. 메모리얼 데이 연휴 금요일 저녁 7시. 문을 연 치과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기적처럼 한 곳에서 전화를 받았다. 막 퇴근하려던 참이라는 의사는 친절하게도 “10~15분 사이에 올 수 있으면 기다리겠다”고 했다. 병원 주소를 보니 마침 식당 근처였다. 통증으로 무너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찾아간 딸을 맞아준 의사는 애나, 그리스계의 50대 여성이었다.
통증의 원인은 치아가 깨져 생긴 금. 금간 틈으로 신경이 노출되면서 통증을 유발했다. 간호사도 동료 의사도 없으니 제대로 된 치료를 할 수 없는 상황. 의사는 임시로 응급처치만 하겠다고 했다. 상처에 반창고를 붙이듯 신경이 노출된 부위에 얇은 막을 덮는 것이었다. 금 간 치아에 젤을 바르고 빛을 쪼여 굳게 한 후 의사는 일단 통증이 가라앉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셀폰 번호를 주면서 “필요하면 언제든 전화하라, 신경치료 전문의인 동료에게 미리 전화를 해두겠다”고 했다.
덕분에 딸은 다음날인 토요일 하루를 무사히 넘겼다. 하지만 일요일 아침부터 다시 통증이 시작되었다. 그 사이 애나는 “지금 상태가 어떤 지 걱정이 된다. 아프면 바로 연락하라”는 텍스트를 여러 차례 보내왔다. 통증이 심하다고 하자 애나는 신경치료 전문의에게 전화해 다음날인 메모리얼 데이 오후 예약을 잡아주었다. 나파밸리의 치과에 가서 신경치료를 받고 난 후 딸은 예정보다 하루 늦은 화요일에 집으로 돌아왔다.
기대했던 여행은 평생에 다시없을 악몽으로 끝이 났다. 반면 생면부지의 남으로부터 생애 가장 따뜻한 배려를 받아본 특별한 경험이기도 했다. 지금도 생각하면 너무 고마워서 가슴이 뭉클해진다고 한다. “세상에는 천사가 있다. 애나는 나의 수호천사였다”고 딸은 말한다.
딸은 감사의 표시로 애나에게 꽃을 보냈고 애나는 이렇게 답을 했다. “나파 밸리까지 가서 와인 한잔도 못했으니 너무 안됐다. 다음에 오면 같이 나파 밸리에 가자. 거기 내 친구가 운영하는 와이너리가 있다.” 그들은 친구가 될 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타고난 선한 본성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삶의 매순간이 경쟁인 치열함에 길이 들어서, 남을 밟고 올라가야 살아남는다는 강박감이 깊어져서 선함은 나이만큼 뒤로 밀린다. 그렇게 수십 년 살다보면 어느 순간 탐욕과 이기심만 가득한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혹 성공을 했다 해도 주변에 사람은 없고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어 허망하기만 한 껍데기 인생들이 많이 있다.
인생이 알차게 되려면 삶에 의미가 있어야 한다.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길은 스스로를 다른 이들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뭔가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면서 남들에게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을 찾고, 그 전문지식을 이용해 이웃을 돕는다면 삶에는 의미가 담긴다. 좋은 예가 의사라는 직업이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만큼 고귀한 일은 없다. 하지만 모든 의사들이 카멜의 치과의사 애나 같지는 않다.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는 매정할 만큼 사무적이어서 오히려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는 환자들이 많이 있다. 환자를 3인칭의 대상으로 대할 뿐 2인칭의 영역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닥터 애나가 특별한 것은 생전 본 적도, 다시 볼 일도 없을 낯선 사람의 아픔을 2인칭의 아픔으로 느꼈다는 사실이다. ‘그’의 아픔이 아니라 ‘너’의 아픔으로 느끼며 애나는 세세하게 마음을 썼다. 그런 사람 곁에는 사람이 모이고, 그런 인생은 의미로 충만해질 수밖에 없다.
식물을 창가에 두면 잎도 가지도 모두 한 쪽으로 기운다. 해가 있는 쪽이다. 식물의 이런 성질을 굴일성(屈日性)이라고 한다. 식물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어둠을 기피하고 빛을 좋아한다. 생명에 이로운 기운이 빛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굴일성이 있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가 있는 가하면 피하고 싶어 하는 이가 있다. 전자는 해와 같은 존재, 후자는 어둠과 같은 존재이다. 전자는 생명에 이로운 기를 가진 사람, 친절하고 배려심 깊으며 긍정의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다. 옆에 있으면 용기가 나고 기운이 솟는다.
요즘 폭염 못지않게 열 받게 하는 일 많은 세상에 간혹 한줄기 바람처럼 시원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 덕분에 세상은 불평등, 부정의, 부정부패, 아집과 편견의 ‘악천후’ 속에서도 이만큼 돌아가는 게 아닐까 싶다. 각자 조금씩만 이웃에게 더 잘하면 좋겠다. 세상이 어떠하든 결국은 행동하지 않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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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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