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인연’이라는 말을 검색해 보게 되었다. 평소에 사람들 사이의 관계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그보다 훨씬 더 깊은 뜻이 있었다. 인(因)은 결과를 낳는 내적인 원인이며, 연(緣)은 주변에서 이를 돕는 간접적인 원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인연이 있다’는 것은 내적인 원인과 외적인 조건이 다 맞아 이루어지는 관계를 가리킨다고 하겠다.
인연을 검색해 본 것은 얼마 전 뉴욕에 사는 둘째 애가 권한 영화 때문이었다. 한인 감독의 작품인데 ‘인연’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나만큼 감성적인 둘째는 그 영화를 보고 울었다고 했다. 그래서 ‘Past Lives(전생)’라는 제목의 이 영화를 친구들과 극장에 가서 같이 보았다. 이제 지역 극장에서의 상영은 거의 다 끝났지만 독자들도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보기 바란다.
불교 사상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이 영화에서는 삼생(三生: 전생, 현생, 내생)이 거론된다. 현생에서의 만남은 분명 전생에 어떤 관계가 있었기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또한 현생에서의 관계는 내생에 어떤 모습으로라도 이어질 것이란다.
영화에서 ‘나영(후에 ‘노라’로 개명)’은 12살 때 친구인 ‘해성’을 한국에 남겨 두고 캐나다로 이민을 간다.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이민한다. 나영과 해성은 그렇게 떨어져 산다. 헤어진지 12년 만에 짧은 기간의 온라인 만남을 거친다. 그리고 또 한 번의 12년이 지난 후 해성은 나영을 만나러 뉴욕으로 간다.
만났을 때 나영은 해성을 허그해 준다. 해성은 어색하게 받는다. 며칠 동안의 만남을 마치면서 해성은 이미 결혼한 나영과 현생에서 맺어질 수 없는 현실 앞에 내생을 기약한다. 이제 2분 후면 해성이 타고 떠날 택시를 기다리며 둘은 마주 보고 선다. 침묵이 흐른다. 나는 둘이 어떻게 하나 궁금했다. 그러나 그 부분은 아직 영화를 못 본 사람들을 위해 공개하지 않겠다.
뉴욕 이스티 빌리지의 작은 아파트에 사는 유태인 작가 남편 아서(Arthur)는 노라가 옛 친구를 바래다 주고 올 때 까지 아파트 밖 입구 계단에 앉아 초조하게 기다린다. 돌아온 노라는 아서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낀다. 아서는 노라의 등을 한 손으로 가만히 안아 주며 아파트 건물 안으로 데리고 들어 간다.
이 영화에 나오는 장면들과 대화, 특히 인연을 생각하던 중 떠오른 게 있다. 바로 ‘우연(偶然)’이다. 우연은 ‘뜻하지 않게 저절로 이루어지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무원인(無原因)은 아니며 한자 뜻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사람과 원숭이가 만나는 ‘짝’ 우와 ‘그럴’ 연이 합쳐진 것이다. 그러니 우연이란 계획하진 않았으나 그래도 인연이 있었다는 뜻을 내포한다.
나는 이 ‘우연’이란 제목의 노래를 좋아한다. 내가 1979년 여름 고국 방문 때 재개봉된 ‘사랑의 스잔나’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그 때 나와 동갑내기 여주인공 진추하의 청초한 모습에 반했다. 그리고 가수이기도 했던 그가 노래하는 모습을 그 해 여름이 다 지나 중국어를 공부하러 갔던 대만에서 TV를 통해 다시 보았다. 그 때 노래 제목이 ‘우연’이었다.
노래 가사는 중국 현대시의 개척자인 서지마 (徐志摩)의 시라고 한다. 가사 가운데 흑암 해상에서의 우연적인 만남이 나온다. 그러면서 기억해도 좋지만 잊는 게 최선이라고 하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는 그 잊어야 하는 대상이 만남에서 서로 밝혀 주었던 불빛이라고 하는 대목도 나온다.
나는 여기에서 시인이 반어법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우연에도 분명 여느 만남과 다름 없이 인(因)이 있다면, 오히려 잊어도 좋지만 최선은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불빛을 잊어야 할 대상이라고 한 부분에도 서로의 앞길을 밝혀 주는 매개체가 되어야 한다는 시인의 바람이 담긴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전생’ 영화에서 내생을 기약하는 해성의 가슴 아픈 고별인사를 현생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의 인연이라도 서로의 앞길을 밝혀 주는 기회로 만들자는 축복인사로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연이라 생각되는 만남들도 모두 서로를 위한 축복의 불빛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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