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링컨, 왕이에 ‘해킹 우려’ 강조…中관영지 “상무장관 방중 협상력 확보용”
▶ ‘위험’이 제재유지 명분 될 가능성…중국, 디리스킹 직접 정의하며 미국 비판
서방이 디커플링(공급망 등 분리) 대신 '디리스킹'(de-risking·위험 경감)을 대(對)중국 관계의 새 목표로 공언한 가운데, 미국이 최근 잇단 미 정부기관 해킹 공격의 배후로 중국을 지목하면서 '위험'의 존재 여부와 내용이 새로운 정치적 쟁점으로 떠오르는 형국이다.
14일 중국 외교부에 따르면 왕이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과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전날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회의가 열린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만났다. 블링컨 장관의 지난달 방중 이후 24일 만의 재회다.
미·중 양국 외교당국이 공개한 전날 두 사람의 회담 내용은 지난달 대화와 큰 틀에서 비슷했다.
지난달 블링컨 장관은 이견을 인정하되 소통을 강화하고, 양측이 이익을 공유하는 분야에서 협력하자는 의견을 피력했다. 왕 위원은 과장된 '중국위협론' 중단, 중국에 대한 '불법적 독자제재' 철회, 중국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압박 포기, 중국 내정에 대한 간섭 금지 등을 요구했다.
블링컨 장관의 방중 이후 재닛 옐런 재무장관이 중국을 찾으면서 양국의 대화 채널은 경제 영역으로 넓어졌고, 중국은 '정찰 풍선' 사태 유감 표명으로 고위급 소통을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16일부터 있을 존 케리 미 기후변화 특사의 방중이 말해주듯 글로벌 이슈에서의 협력 가능성도 미중이 서로 인정한 상태다.
이에 전날 블링컨 장관은 미중 군사적 충돌 방지를 위해 양국 군대 간 소통 채널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보폭을 넓혔다. 경제 회복을 우선순위에 두고 있는 중국 정부는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의 중국 방문 가능성에 대해 "환영한다"는 입장을 발표하면서 다른 방향으로 접촉면 확대를 시도했다.
'영역별 소통을 유지하며 가능한 영역에선 협력하자'는 것이 관계 안정화를 위한 최근 미중의 대화 구도라면, 최근 불거진 '중국발 해킹' 문제는 양국이 회담을 평가할 때마다 쓰는 '솔직함', '건설적' 등 표현의 흐름과는 유독 따로 노는 쟁점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은 블링컨 장관과 왕 위원의 2차 회담 직전인 12일(현지시간) 중국 해커그룹이 지난달 중순 미국 정부 당국자들의 데이터를 빼가는 사이버 공격을 했다고 밝혔다.
확인된 피해자에는 방중 가능성이 거론되는 무역 제재 주무 장관인 러몬도 상무장관이 포함됐고, 국무부 직원들도 공격 대상이 된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 외교부는 "허위 정보"라며 즉각 반발했지만, 블링컨 장관은 다시 만난 왕 위원에게 직접 이 문제를 제기하며 중국 해커그룹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강조했다. 왕 위원이 이 문제에 어떻게 답했는지는 양국이 발표한 회담 결과에 나오지 않았다.
왕원빈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14일 정례브리핑에서 "왕이 위원이 회담에서 인터넷 보안 문제에 대해 중국의 원칙적 입장을 소개했다"며 "중국의 정부 부처는 거의 매일 대량의 사이버 공격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사이버 공격의) 대부분은 미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중국은 이미 여러 차례 국제사회에 관련 상황을 소개했다"며 "중국이야말로 사이버 공격의 가장 큰 피해자이고, 미국은 중국에 함부로 누명을 씌우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 관영매체도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날 글로벌타임스는 "이 시기에 미국이 갑자기 중국 해커의 공격을 공개한 것이 우연인가"라며 "미국 측의 일관된 접근법상 그들은 여론 상의 우위를 차지하고 러몬도 장관의 협상력을 높일 수단으로 이 사건을 이용하고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매체는 지난달 블링컨 장관 방중을 앞두고도 미국을 상대로 한 중국발 해킹 사건이 발표된 적 있다면서 "지난 몇 년 동안 미국이 '중국 해커들'을 과장한 것을 보면 일반적인 패턴이 있다"며 "이 사건들은 대개 중미 관계의 중요한 시기에 발생하는데, 이는 양국 관련 이슈에서 진전이 없는 시기와 일치한다"고 했다.
중국의 반응과는 별개로 '중국발 해킹' 문제는 미중 사이의 유력한 쟁점이 될 가능성이 생겼다는 관측이 가능하다.
디커플링에서 디리스킹으로 명시적 목표를 바꾼 미국 입장에서는 자국 정부 기관에 대한 사이버 공격은 현존하는 '위험'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위험의 내용이 해킹이라는 첨단 기술과 관련됐다는 점에서, 중국이 공격의 배후라는 점이 확정되면 디리스킹 명목으로 중국에 부과된 반도체 등 분야에서의 수출 통제·제재 문제와 연결될 수도 있다.
앞서 마크 워너 미 상원 정보위원장은 성명에서 "정보위는 중국 정보기관의 소행으로 보이는 중대한 사이버보안 침투를 긴밀히 주시하고 있다"면서 "중국이 미국과 동맹들을 겨냥한 사이버 수집 역량을 꾸준히 개선하고 있다는 게 분명하다"며 대중국 압박에 가세하기도 했다.
미국이 제재와 해킹 사건의 칼자루를 모두 쥔 상황에서 중국은 당장 부인하는 방식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모양새다.
중국 외교부는 전날 브리핑에서 "미국이 (중국에 대한) 인터넷 공격 행위에 대해 해명을 내놔야 한다"는 입장을 되풀이했다. 이후 별도로 시간을 내 디리스킹에 관한 '중국식 정리'를 소개했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위험 제거라는 것을 이야기하려면 우선 무엇이 위험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며 "중국은 기회이지 위험이 아니다. 중국을 위험의 근원으로 취급하는 것은 완전히 대상을 잘못 잡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시아·세계 금융위기 대응, 일대일로(一帶一路: 중국-중앙아시아-유럽을 연결하는 육상·해상 실크로드)나 글로벌 개발·안보·문명 이니셔티브, 사우디아라비아·이란 관계 개선 중재 등에서 중국이 행한 역할을 강조했다.
중국 외교부는 "오늘날 세계에선 협력하지 않는 것이 최대의 위험이고, 발전하지 않는 것이 최대의 불안"이라며 "각국이 함께 막아야 하는 것은 정치적으로는 대결과 '신냉전' 책동의 위험, 경제적으로는 디커플링과 공급망 단절로 장벽을 쌓는 위험, 군사적으론 사방에 간섭·침략을 하고 무장 동맹을 확대하는 위험, 외교적으론 내부의 문제를 외부의 적에 전가하는 위험 등"이라고 주장했다.
직접적으로 미국을 호명하지 않았을 뿐 그간 중국이 미국을 비판할 때 써온 표현들로, 미국을 '위험'으로 지목한 셈이다.
중국의 이런 논리는 미국이 소통 채널을 유지하면서도 디리스킹을 지렛대로 제재 해제 등 유의미한 현상 변경에 나서지 않을 경우를 대비한 '명분 쌓기'라는 해석도 나온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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