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부터 미주지역 동포사회 지도자들 중 한 분이었던 이민휘 회장이 지난 6월24일 9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이민휘 씨는 경기중, 배재고, 연희대를 거쳐 동국대학교를 졸업했다. 나는 이민휘 씨가 별세하기 얼마 전까지도 통화를 나누던 터였다. 그는 나의 대선배다. 그가 쓴 자서전 ‘이민휘 외길’ 서문(축사)도 내가 썼다.
이민휘 씨와 나(정기용)와의 비공개 일화 한토막. 내가 발행하던 민주화 운동 투쟁지 ‘한민신보’ 타자기는 원래 샌프란시스코한인회의 것이었다.
이민휘 씨는 산호세 대학 졸업 후 잠시 귀국했다가 부인 이봉희 여사와 장남인 젖먹이 원영이를 데리고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화랑 태권도장’을 운영하다 한인회장에 당선되었다.
컴퓨터 같은 기기가 전무했던 시절, 타자기는 유일한 한글 신문 발행 수단이었다. 정부가 한인회에 기증한 걸 내가 빌려 쓴 것이다. 이민휘 씨는 상항 총영사관 특히 중앙정보부의 타자기 회수 압력을 견디며 한민신보 발행을 계속하게 하는 의리를 지켜 주었다.
나는 이민휘 씨와 단 한번도 단체 혹은 조직활동을 함께 한 일이 없다. 그런데도 무슨 인연인지 그는 나를 항상 옹호했고 후원해 왔다.
이민휘 씨는 혈기 왕성하던 청년시절 수도극장 천정에 따발총을 난사하는 사고를 친 적이 있다. 자유당 시절 이정재의 오른팔이던 유지광이 정면 격돌을 피했다는 일화도 있고 남대문 일대를 장악했던 신 상사(본명 신상현)와도 말을 트고 지냈다.
어느날 그가 메디칼 센터에 입원한 적이 있어 찾아 갔는데 마침 오따(본명 정종환, 지난해 사망)가 문병을 와 있었다. 오따는 현재까지 한국 폭력세계의 총 두목으로 군림해 왔던 인물이다. 그도 이민휘 씨에게 만큼은 깍듯이 존대 예의를 갖추었다. 일본 야쿠자(당시 총두목, 재일동포 정건영)도 이민휘 씨가 나타나면 거의 칙사 대접을 하곤 했다는 사실은 수행했던 여러 미주 동포들에게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민휘 씨는 그런 위세를 한번도 악용한 일이 없었다. 조직을 만들어 집단폭력 행위를 하거나 흉기로 폭력행위를 하거나 상인들, 기업인 재벌들을 협박하고 갈취하는 따위의 암흑세계에 발을 디딘 적이 절대 없었다. 그를 가리켜 ‘깡패’ 운운하는 것은 일방적 모략이나 황당한 오해다. 오히려 그는 어려운 이웃들을 도왔고 학자, 문화, 예술인 등 지식층과의 교분이 두터웠던 협객이라 하겠다.
이민휘 씨 부친 이규갑 목사는 상해 임시정부 창립 발기인이고 기미독립선언 33인 가운데 한 분인 이갑성 선생이 그의 장인이다. 독립운동가 집안 배경을 가진 영향때문인지 이민휘 씨는 줄곧 정권 편에 서 있었지만 실제로는 어느 정당, 정치 조직에도 가입한 사실이 없다.
국가 정통성을 이어가되 엄정 중립을 지향하는 몸가짐을 가졌던 것이다.
연설 방해 계란 투척 사건으로 악연이 있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친구였던 권노갑 민주당 원로고문의 중재로 화해했다. 이민휘 씨가 외환 관리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룬 것은 박정희, 전두환 신구 세력간 갈등에서 덫에 걸려 수난 당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민휘 씨의 미국 동포사회에서의 업적은 그야말로 눈부시다. 그는 2회에 걸친 샌프란시스코 한인회장 임기동안 일본 정부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데 앞장섰던 스티븐슨 고문을 저격하고 사형선고를 받은 장인환, 전용운 두 의사의 유해를 국내 현충원에 안장시켰다. SF 한인회관(현재도 사용 중)을 건립했다. LA 한인회장도 역임했다.
전미주한인회 총연합회(미주총연) 회장을 역임했고 10여개에 걸친 재미 한인 각종 체육 단체장직을 두루 수행하며 국내 전국 체육대회에 미주 동포팀을 참가시킨 일등공신이다. 뉴욕의 전호일, LA 이경재, 샌프란시스코 박희덕, 시카고 김창범, 워싱턴 최병근, 송재경 씨 등 동포사회 지도자들, 체육 단체장들이 이민휘 씨와 함께 했다. 그는 국내외 선후배들에게 ‘영원한 회장’으로 불려 왔다.
서울에서는 자유광장(공동대표 박기상), 내가 창립 출범시킨 한국 서민연합회(상임고문 신승길) 광화문 사무실에 빈소를 차리고 조문객을 맞았다.
이민휘 씨가 어느날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부인 이봉희 여사의 병세를 설명하며 ‘울컥’한 일이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그의 눈물이었던 것 같다.
이봉희 여사는 영어, 중국어에 능통한 재원이고 두 아들 원영, 일영은 헐리우드 배우로 활약 중이다. 새삼 그의 서거 앞에 인간 삶의 한계(Boundary Situation)를 절감, 허무가 밀려온다. 이민휘 형님의 명복을 빈다. (571)326-66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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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용 전 한민신보 발행인,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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