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라고는 조니 워커와 시바스 리걸 말고는 몰랐던 내게 리쿼 스토어 매장은 완전 신세계였다. 지금은 이런 표현이 통하지 않겠지만, 미국에 와서 토이자러스와 블락버스터를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 그런 것.
위스키, 보드카, 럼, 진, 테킬라가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 서처럼 각자의 왕국을 지키고 있는데 아무래도 먼저 눈이 가는 곳은 위스키, 그 중에서도 스카치 위스키 섹션이다.
하나 하나 병 모양을 감상하고 레이블을 읽다 보니 글렌(Glen)으로 시작하는 이름이 왜 이렇게 많은가. 글렌리벳, 글렌모렌지, 글렌피딕, 글렌파클라스, 글렌갤리, 글렌 모레이…
스카치 위스키에 글렌 항렬이 많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글렌은 계곡 그 중에서도 좁고 깊은 협곡을 뜻하는 켈트어에서 나왔다. 지형이 고지인 만큼 계곡이 많이 형성되어 있고 1) 위스키를 만드는 데 필요한 물을 구하기 쉬운 골짜기 바닥, 2) 증류소를 짓기에도 산꼭대기보다 낮은 바닥이 수월했으니 계곡 이름을 딴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우리 식으로 하면 밤나무 골 율곡(栗谷).
그래서 ‘글렌 썸씽’이면 위스키의 종가 스카치로 믿고 손이 가게끔 되는데 이 점을 파고 들어 글렌을 상표에 단 독일 위스키가 나와 유럽재판소에서 소송이 벌어지기도 했다. 여러 판례를 거쳐 글렌은 백파이프, 하일랜드(Highland)와 더불어 스코틀랜드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인정받고 있다.
글렌 말고도 골짜기에는 데일(dale)이 있다. 데일은 넓은 강이나 바다로 이어지는 낮은 계곡에 붙인다.
워싱턴 메트로의 코리아타운인 버지니아의 애난데일(Annandale)이 여기에 해당한다. 1685년 스코틀랜드 출신들이 이 땅에 정착하면서 고향땅 아난 강(Annan River) 하구를 연상해서 붙인 지명이다. 한국식당 아난골이 어원상 근거가 있는 상호인 셈이다.
메릴랜드의 힐란데일(Hillandale) 역시 지형의 특징을 살려 지은 지명이다. 18세기 초 지금의 실버 스프링 동쪽에 있던 920 에이커의 땅이 유산으로 나뉘면서 그중 ‘언덕과 계곡(Hills and Dales)’이 많은 한 필지에 그 이름이 붙여졌다.
더 최근에는 I-95를 따라 내려가는 버지니아의 데일 시티(Dale City)가 있다. 신도시를 개발하면서 이곳 애팔레치안 동부 낮은 구릉지대의 특징인 야트막한 계곡, 데일을 붙였다.
글렌으로 돌아가자면 디씨에 가까이 붙어 있는 글렌 에코(Glen Echo)를 꼽겠다. 계곡물이 시원하게 흐른다. 1888년경 오하이오 출신의 발츨리 쌍둥이 형제가 이 일대를 개발하면서 붙인 지명인데 “워싱턴의 라인강, 포토맥 강변의 글렌 에코”라며 투자자들을 유인했다. 미국 적십자의 어머니 클라라 바튼이 1897년 이 단지에 들어와 1912년 세상을 뜰 때까지 전차로 시내 사무실을 오갔다고 한다.
서울의 창경원, 뉴욕의 코니 아일랜드처럼 워싱턴의 위락공원으로 사랑받던 글렌 에코 공원은 현재 국립공원이다. 꽃 피는 봄이면 꼭 가봄직한 보석 같은 존재다.
볼티모어에서 가까운 글렌 버니(Glen Bernie)도 있는데 이 경우는 지형이 아니고 땅 임자의 성에서 나왔다. 검사장을 지낸 엘리아스 글렌(Elias Glenn)이 자기 땅에 붙인 글렌스번(Glennsburne)이 후손들에게 상속되며 세월 따라 변한 이름이다. 글렌이라는 성 자체가 ‘계곡 출신’에서 나왔을 터이니 크게 봐서는 뿌리가 같다.
글렌과 데일, 깊은 계곡과 넓은 계곡이 합쳐진 글렌데일(Glendale)이라는 지명도 있다. 이곳은 아니고 캘리포니아 엘에이 인근의 도시. 1884년 주민들의 결의로 그렇게 이름지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남의 일이라 배경까지 알아보지는 않았다.
글렌 데일은 아르메니안이 많은 동네로 알려져 있다. 미국내 아르메니안계의 무려 삼분의 일이 거기에 살고 있다. 볼리비아 이민자들이 알링턴 주변에 몰려 살듯이. 볼리비안처럼 워싱턴 일대에 집중된 이민 커뮤니티에는 에티오피아와 그 이웃 에리트레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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