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세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 도산의 무실역행·충의용감 정신 평생 받들어
병약한 체질… 평생 무리 않고 절제로 장수, ‘꿈은 이뤄진다’는 긍정적 자세로 노력해야
103세의 나이에도 강의를 하며 노익장을 과시하는 김형석 교수는 “미주 한인들이 정직과 성실을 실천하면서 미국인들의 존경을 받으면 자연히 그 사회에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흥률 기자]
“미주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동포들이 도산 선생처럼 정직하고 성실한 삶으로 한국인의 뜻과 인격을 보여줌으로써 미국인들로부터 존경받으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1920년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6·25전쟁, 경제성장과 민주화운동 등 험난한 한국 현대사의 현장을 몸소 겪었다. 또한 윤동주 시인과 한 반에서 공부했고 도산 안창호 선생의 설교를 직접 들었으며 광복 직후 만경대 고향에서 김일성과 식사를 하기도 하는 등 역사적인 인물들과 동시대를 살아온교육자로 김태길(2009년 별세)·안병욱(2013년 별세) 교수와 함께‘한국의 3대 철학자이자 수필가’로 불렸다.‘병약한 체질’이었지만 이제는‘건강한 장수’의 상징이 된 김형석 교수는 지금도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하는 등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지난 4월23일로 103세 생일을 맞은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를 서대문구 원천교회에서 만나 올해 이민 120주년을 맞는 미주한인사회에 전하는 메시지 등을 들었다. 다음은 김형석 교수와의 일문일답.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은
▲나는 무척 병약한 체질로 태어났다. 모친은 “네가 스무 살까지만 살아도 좋겠다”라고 말하곤 했다. 심지어 14세가 되는 정월 초하루에 내가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모친이 꾼 후에 그 해를 넘기기 힘들 것으로 예측했다. 어릴 때 그냥 의식을 잃는 현상이 몇 차례 있었는데 중학교를 간 후부터 진정되었다. 50대 들어서야 평균 건강을 유지하게 되었으며 현재까지 장수하면서 건강하게 활동하고 있다. 내 주변에 100세 넘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욕심이 많지 않고, 명예욕구도 적으며 또한 화내거나 남을 욕하지 않으며 남에게 도움을 주려는 공통점이 있다. 지금도 매일 걷고 일주일에 두 번 수영을 하는 등 규칙적으로 운동을 한다. 매일 오전 6시반경에 일어나 우유 반 잔, 호박죽 반 잔, 계란 반숙, 샐러드, 토스트나 찐 감자를 먹으며 점심과 저녁은 생선이나 고기 등을 먹는다. 특히 항상 공부를 해야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
-본인 인생의 전성기는 언제였나
▲내 인생의 전성기는 65~80세였다. 80세까지 늙었다든가, 병약하지 않았다. 인생의 결실을 80세에 보았다. 살아보니 90세까지는 늙는 게 아니고 누구나 일할 수 있다고 본다.
나처럼 약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장점이 있다. 무리를 하지 않고 절제한다는 것이다. 한평생 많은 일을 했지만 100의 일을 할 수 있어도 언제나 90까지의 책임을 맡았다. 그래야 120까지 일을 하게된다. 처음부터 120을 맡으면 100도 못하는 법이다. 백세되는 해에 청와대에서 지팡이를 선물로 받았는데, 앞으로도 20~30여년은 거뜬히 더 살 수 있다고 본다.(웃음)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17세이던 평양숭실중학교 3학년때 도산 안창호 선생의 설교를 접한 후 그를 평생의 멘토로 삼게됐다. 도산이 병보석으로 고향에 와서 7~8개월 있을 당시 송산리 교회에서 청중이 200여명 모였을 때이다. 도산의 설교를 들은 후 생활의 변화가 있었고 애국심이 생겼으며 “민족과 국가를 위해 사는 것이 보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산 선생의 설교는 그 여느 목사와도 달랐으며 그는 ‘우리 사랑하자’고 웅변했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건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사랑해주시는 것과 같다’고 했다. 또한 그의 설교를 통해 교리 대신 ‘진리’를 깨달았고 교회보다 한 단계 높은 ‘하늘나라를 위한 신앙’을 추구하는 등 정신적인 차원이 높아졌다. 도산은 일본이 지배하는 식민치하에서도 일본인의 존경을 받았으며 초기 미주한인이민자로서 남가주 리버사이드의 오렌지 농장에서 오렌지 따는 일을 할 때도 최선을 다한 분이다.
-미주 한인사회와 인연이 각별한데
▲교환교수로 1961년 시카고 대학, 1962년 하버드 대학에 있었는데 당시는 주로 신학 및 철학 강의를 수강했으며 1972년 텍사스 오스틴 대학에서 한 학기 강의를 했다. LA에도 도산 안창호 선생의 동상이 있는 리버사이드 등을 비롯해 3차례 들렀다. 또한 강연회와 교회 설교를 위해 미국과 캐나다 등지를 자주 방문해 미주지역과 50여년의 왕래가 있는 셈이다. 슬하에 2남4녀가 있으며 결혼 후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딸 셋(둘째, 셋째, 막내)은 텍사스, 오하이오, 워싱턴 DC 등에 살고 있다. 큰 손녀(장남 김성진 교수 부부의 장녀)도 미국에서 대학 교수로 일하고 있어 미주한인사회에 관심이 많다.
-올해 이민 120주년을 맞은 미주 한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중앙고 교사 시절 제자로 정치학을 전공한 텍사스A&M대 노광해 교수가 생각난다. 일찍부터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했는데 미국 학생들은 학점만 따면 끝이고, 교수들도 친했다가 은퇴하면 남이 되는 환경에서 노 교수는 한국의 사제관계가 부러워 안식년을 맞아 영남대에서 가르치며 한국행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런데 노 교수가 휴스턴의 한글 책방에서 나의 저서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를 읽고 마음이 바뀌었다고 편지를 보냈다. 미국 학생들을 한국 제자들처럼 사랑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부인도 책을 읽고 신앙을 가진 사람이 어디에서든 형제애를 보이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됐다고 알려왔다.
신앙의 말씀이 전해지면 인격과 인생관이 바뀌게 되는 걸 알았다. 미국에서 살면서 미국 사람들에게 한국 사람의 뜻과 인격을 보여준 사례이다. 미주 동포들에게 “일상생활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면서 미국 사람의 존경을 받게되면 자연히 그 사회에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는 말씀을 당부하고 싶다.
예전에 김영삼 대통령이 방미시 이야기한 것처럼 현지에 적응해서 잘 살면서 미국을 대표하는 코리안 아메리칸이 되었으면 한다. 이미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 사람들과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무실역행(務實力行), 충의용감(忠義勇敢) 정신을 몸소 실천한 것을 본받았으면 한다.
-젊은이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말은
▲중학교 다닐 때 윤동주 시인, 황순원 작가, 홍창의 소아과 의사와 함께 수학했다. 이들은 그 당시 이미 시인과 작가, 소아과 의사가 되겠다는 확고한 꿈을 가졌다. 특히 서울대학교병원장을 지낸 홍창의 소아과 의사는 “반드시 의사가 되어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어린이들을 살리겠다”고 비장한 각오를 밝혔는데 마침내 꿈을 이뤘다. 나도 당시에 철학자, 교육자가 되겠다는 꿈을 정했다. 젊은이들이 어떤 어려움 가운데도 꿈을 가지고 자기희망을 만들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꿈은 이뤄진다”는 긍정적인 생각과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
-최근 저서 ‘100세 철학자의 행복론’에서 강조하는 행복의 본질은
▲행복은 하루하루의 진실하고 값있는 내용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욕망이나 환상으로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욕심은 행복을 놓치게 만들어도 값있는 봉사는 불행을 느끼게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내가 처한 현실에서 더 귀하고 값있는 성장과 노력을 쌓아가야한다. 그러한 삶의 과정에서 언제나 깊은 행복이 솟아오르게 마련이다.
나를 위해서만 산다면 행복하지 않다. 남과 나누고, 배려하고 베풀 때 진정으로 행복감을 누리게 마련이다. 그래서 예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이야기한 것 같다. 세상에서 제일 강한 것은 ‘사랑’이다.
-탈북 실향민으로서 남북통일은 언제쯤 가능하다고 보나
▲아내와 장남을 데리고 1947년 8월20일에 황해도를 통해 월남했다. 나도 실향민으로 죽기 전에 남북통일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다. 이미 몇 차례 통일 기회를 놓쳤다. 현재 초등학교 학생에게 남북통일에 관한 설문조사결과, 이대로 살면 되지 않냐는 답변이 대부분이다. 이제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중국과 러시아의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자유주의가 부상하고 ‘열린사회’가 ‘폐쇄사회’를 앞지르다보면 자연스럽게 통일이 이뤄질 것으로 본다. 이젠 북한을 통일한다고 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인적교류가 생기면서 언어, 문화, 경제교류를 통해서 한 세대 정도는 지나야 자연스럽게 하나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 김형석 명예교수 약력
▲1920년 평안남도 대동군 출생.
▲1943년 일본 조치(上智)대 철학과 졸업
▲1947년 중앙중 교사
▲연세대 철학과 교수(1954∼1985년)
▲2012년 강원도 양구에 김형석
철학의 집 건립
▲현재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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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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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젊었을 적에 참으로 존경했던 분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늙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제일 먼저 떠 올리게 하는 분이다. 동아일보에 가끔 올라오는 그의 칼럼을 읽고나서였다. 나이 들었다하여 정치적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서는 안된다는 게 아니다. 사람이 나이 들고 성숙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사물을 보는 시각이 넓어진다는 게 아니겠나? 그런 식으로 1000 년을 살면 뭐하나?
미안한 말이지만, 이 분 그냥 조용히 계셨으면 좋겠네요. 격동의 현대사에서 양지만 찾아다니고, 지금도 양지만 지향하는 분이라서 존경심 하나도 안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