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숨을 쉬는 순간까지 살아있는 신화(神話 아니 神化)가 된 예를 하나 들어보리라. 현대 무용의 어머니로 불린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 1894-1991)은 1990년 191번째 창작무용 ‘단풍나무잎 랙 리듬(Maple Leaf Rag)’을 발표, 1991년 순회공연을 다녀오다가 96살(한국 나이로는 97세)의 나이로 폐렴에 걸려 사망할 때까지 영원한 현역임을 고집했다.
1932년대 후반, 350년간 이어져 내려온 고전(古典) 발레의 꽉 짜여진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생생한 무용언어를 구사하여 세계 무용계에 현대 무용 바람을 불러일으킨 주인공이 바로 마사 그레이엄이다. 그녀의 혁명적 표현 양식의 ‘그레이엄 기술(Graham technique)’로 현대 무용가들 모두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녀는 생전에 이런 말을 했다. “움직임이란 사람이 감추려고 하거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서를 표현하는 거죠. 나는 내 무용이 이해되기를 바라지는 않아요. 그저 관객이 뭔가 느끼면 됩니다. ” 다시 말해 “춤이란 몸의 노래, 기쁨이나 아픔을 몸으로 노래하는 거죠.”라 했다.
그녀는 1969년 75세까지 직접 무대에 섰고, 1920년 창단한 무용단을 이끌면서 200 작품이 넘는 무용을 안무했다. 그녀의 춤은 관능적이고 신비하며 현대 예술과 원시 문화 간의 유사성이 항상 내재하는 것이 특징인데 현대무용에 있어 낭만주의의 절정을 이룩했다.
또 음악가들은 장수를 누리기로 잘 알려져 있다. 런던의 위그모 홀(Wigmore Hall)에서 만 98세가 된 (정확히는 이틀 모자라는) 폴란드계 미국인 피아니스트 미치슬라브 호르조브스키 (Mieczyslaw Horszowski 1892-1993)가 피아노 독주회를 가져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는 기사를 본 일이 있다. 그의 친구며 연주 파트너였던 스페인의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 1876-1973)는 그의 나이 95세 때 뉴욕에 있는 유엔 본부에서 첼로를 연주했다.
유대계 독일의 지휘자 오토 클렘퍼러(Otto Klemperer 1885- 1973)는 88세로 그의 삶을 마칠 때까지 지휘를 했고, 프랑스 출신 미국의 지휘자 삐에르 몽뙤(Pierre Monteux 1875-1964)는 그가 세상을 떠나던 해인 나이 89세 때 런던 교향악단과 20년 계약을 맺는 계약서에 사인했다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단어가 있다.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가 6.25가 터졌고 1.4후퇴와 9.28 수복후 고등학교에 진학해 독일어를 배우면서 접하게 된 두 단어가 내 평생의 화두가 되었다. 다름 아닌 ‘자인’ 과 ‘졸렌’이라 발음하는 ‘sein’과 ‘sollen’이다. 영어로 하자면 ‘to be’와 ‘ought to be’가 되겠다. 전자가 본질적인 실존성이라면 후자는 책임감 내지 사명감의 당위성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이성(異性)과 자식 사랑이 실존성이라면 부모에 대한 효심이나 친구에 대한 의리, 또는 애국심은 당위성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두 가지가 때때로 복합적으로 작용하겠지만 말이다.
조숙했던 탓인지 나는 아주 어린 나이에 달관 비슷한 것을 좀 했었나 보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볼 때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갖은 풍파 다 겪으면서 이제까지 언제나 신나게 살아올 수 있었으랴.
어쩌면 그 비결은 ‘어떻든 다 좋아’ 하는 식으로 미리 체념이라 해야 할지 달관이라 해야 할 지를 해온 까닭인지 모르겠다. 영어로는 ‘Anything is better than nothing’이라 할 수 있으리라. 성공이든 실패든 다 남는 장사라는 계산에서다. 어떤 경험이나 결과라도 무경험이나 무결과보다 낫지 않겠는 가에서였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안 태어난 것보다 그 얼마나 더 큰 축복인가란 생각에서 매사에 성공이냐 실패냐가 아니고 총체적으로 봐서 최악 중에 최악이라도 죽는 일밖에 더 있겠나. 설령 내세가 있고 천당과 지옥이 있다 하더라도 지옥 맨 밑바닥에라도 갈 각오만 되어 있다면 두려울 게 없지 않겠는가. 아마 그래서 ‘자살’을 거꾸로 읽으면 ‘살자’가 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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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상/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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