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눈이 시린 느낌이 들더니 기어이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엄마들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시며 왜 주책맞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며, 눈이 짓무르니 연고라도 발라야겠다며, 손수건을 필수로 들고 다니시던 기억이 난다. 눈이 좋은 편이었으나 40대 초반에 시작되었고 얼마 전 400쪽 책 한 권을 필사하면서 얻은 눈병인듯 해 자업자득이라 생각되지만, 그렇게 취급해 버리기엔 그 결과가 가열차게 서럽다.
눈을 시작으로 갱년기의 화려한 등장이 예상되는데 갱년기라는 말이 난 참으로 싫었다. 갱년기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 한번 붙으면 절대 떨어지지 않는 돼지 본드처럼 갱년기라는 오래된 꼬리표가 평생 붙어 다닐 거 같아서 최대한 나잇값의 굴레를 늦게 씌우고 싶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도 갑자기 덥다며 손부채로 부산을 떠는 꼴도 보기 싫고 자다가 땀이 나서 남편과 각방을 쓴지가 오래라며 어찌 같이 자냐며 놀리던 그 중년들의 말들이 나에게는 그저 한낱 핑곗거리로 여겨졌다. ‘뭐 얼마나 덥고, 뭐 얼마나 화가 난다고 저리 기분이 왔다 갔다 할까?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그랬다.
남편에게는 마치 갱년기가 모든 중년 여성의 특화된 권리인 양 요구하고 아이들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잔소리하며 지나치게 간섭해 부모와 자식 간 갈등으로 이어진다. 주위 사람에게는 자신의 내적 갈등을 하소연해 부담으로 이어지고 스스로에게도 갱년기라는 강한 프레임을 씌워 자기만의 연민으로 면죄부를 줄 수도 있다. 특히 사춘기가 질풍노도의 시기라는걸 감안해서 이해해 주려 하듯 갱년기의 반란 또한, 신체적인 현상이라는 사회적 분위기로 그들의 브레이크 없는 질주에 부채질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자만에 자만을 더했던 나의 오만이 요 며칠 완전히 무너지고 있다.
얼마 전 화장실 매트를 리턴 하기 위해 스토어에 갔는데 점원이 이 상품은 이미 오픈해서 안 된다고 했다. 아니, 미국은 리턴의 천국이 아니었던가? 샤워기에 물이 뚝뚝 떨어져도 리턴이 가능하고 신었던 신발도 가능하고 최대 30일 이내에만 가져다주면 리턴을 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나라인데 오픈해서 안 된다고? 겨우 한쪽 모서리에 붙어있는 라벨과 깔판이 분리되었다는 것인데 가격표를 제거한 것도 아니고 이물질이 묻은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하루가 지난 것도, 열흘이 지난 것도 아닌 아침에 샀다가 6시간 후에 색이 맞지 않을 거 같아 리턴하고 다른 색으로 교환을 하려 했는데 안 된다고? 이런!!!
평소 같았으면 모든 걸 내 잘못으로 인정하고 바로 오케이만을 외치며 오히려 미안해하며 그저 창피해서 얼굴 벌개져서 금세 나왔을 일인데 이번엔 달랐다. ‘누구든 걸리지만 해봐라’라는 심정인지라 ‘그래 너 잘 걸렸다’ 싶었다. 일단 점원에게 매니저를 불러달라고 했고 매니저가 잠깐 살펴보더니 역시나 안된다고 했다. 라벨과 제품이 분리되어 당신이 쓴 물건이라고 말했다. 코비드 이후로 오픈하면 리턴이 안된다는 말만 계속했다. 그놈의 코비드 타령은 언제까지 할 거야?
내 영어 실력은 영어로 싸움을 할 정도의 수준이 절대 아니다. 아직도 영어 울렁증에 시달리고 그놈의 망할 언어 때문에 미국이라는 나라에 살고 싶지 않은 게 현실인데 진짜 화가 나니까 어찌 그리 영어가 술술 나오는지 앞뒤 잴 것도 없이 뻔뻔한 아줌마가 되었다. 그런 모습이 나에게 이미 내재 되어 있었는지 영어가 맞는지 틀리는지도 모르게 소리치고 억지 쓰고 눈을 부라리며 다른 사람이 다 듣게 큰소리를 쳤다. 얼굴은 벌개져서 눈빛은 살벌하고 다짜고짜 화를 내며 왜 안되는지 설명하라고 다그쳤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저런 무식하고 되먹지 않은 아줌마가 있나? 아줌마가 되면 다 저러나? 나는 절대 저러지 말아야지'라며 내가 전에 마음속으로 비난했던 그런 마음으로 나를 몇 번이고 쳐다보았을 것이다.
화가 연속되는 요즘, 갱년기가 얼마나 오래 가려는지 모르겠다. 슬픈 생각은 물론이고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를 어찌 살아야 할지 막막해지고, 그저 피곤하다는 생각만 들어 자꾸만 어딘가에 눕고 싶고, 누가 나에게 한마디만 하면 열 마디로 되돌려 주고 싶고, 혼잣말로 상대를 무지하게 싫어하고, 아무 일도 아닌데 화가 나고, 발바닥에선 불이 난다. 그렇다고 24시간 이런 증상이 있는 건 아니다. 이러다가 어느 순간 아무렇지도 않아서 나한테 무슨 갱년기! 이러다가 불현듯 기분이 확 나빠지는 게 미친년 널 뛰는 봄 날씨와 딱 닮았다.
화가 나서 미칠 거 같아 이런 글을 쓰고 있는데 쓰다 보니 글로 마음의 치유가 되었는지 지금은 마음이 차분해지고 오늘은 아들에게 맛난 저녁을 주어야겠다는 생각과 저녁 시간에 어떤 드라마를 보며 맛난 디저트를 먹을까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글이 좋은 건지 마음이 널을 뛰어 그저 시간이 약이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자그마한 선풍기를 차가운 주방 싱크대 위에 올려놓고 그 옆에 올라가셔서 콩나물을 다듬으시던 엄마의 하루가 그리워 나 또한 그 엄마처럼 조용해지기를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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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나 / 엘리콧시티,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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