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주 전 일요일이다. 교육위원 선거 관계로 바쁘지만 보스턴에 사는 큰 애 집에 다녀왔다. 작년에 태어난 손녀의 백일이 되는 날이기도 하고 한 번 밖에 보지 못한 손녀가 보고 싶기도 했다. 백일을 굳이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큰 애의 말을 무시하고 백설기 한 판을 주문해 가지고 갔다.
새벽 일찍 집을 나가 밤 늦게 돌아오는 하루 여행이었는데 피곤했지만 다녀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돌아 오는 비행기 안에서 바로 옆에 앉은 흑인과 내내 대화를 했다. 서로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였지만 대화는 진지했다. 아니 어쩌면 서로 모르는 사이였기에 누구 눈치 볼 필요 없이 그런 대화를 가질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대화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 흑인이 90퍼센트 이상 얘기를 했고 나는 간간이 질문을 던졌다.
내가 비행기에 올라 내 자리를 찾아 갔을 때 그는 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를 보자 머쓱해 하면서 혹시 자리를 바꿔 앉으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나도 창가보다는 복도 쪽 자리를 선호하는데다 그 사람이 굳이 복도 쪽 자리에 앉아야 하는 이유도 없어 보여 그냥 내 자리에 앉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러고 나니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몇 마디 건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대화가 시작되었다.
이 흑인은 라스베가스에서 며칠 보내고 보스턴을 경유해 워싱턴 DC의 집으로 돌아 가는 길이라고 했다. 임시로 그 곳에 가 일하고 있는 약혼녀를 만나고 온다고 했다. 자신이 돌보는 애가 5명이나 되는데 나이는 1살부터 14살까지라고 했다. 두 명은 자기 애들이고 두 명은 약혼녀 애들, 그리고 가장 어린애가 약혼녀와 자신 사이에서 태어난 애라고 했다.
14살 짜리는 자신의 애라고 했다. 그런데 그에게 나이를 넌지시 물어보니 29살이란다! 그러니 틴에이저 나이에 아버지가 된 셈이었다. 그래서 무례함을 무릅쓰고 어떻게 그렇게 이른 나이에 아버지가 되었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그 때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자신을 과시하는 상징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애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절대로 원치 않는다고 했다. 자신은 부모 없이 할머니 아래에서 자랐는데 제대로 훈육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다닐 당시 농구를 잘했다고 했다. 키는 크지 않아 포인트 가드나 슈팅 가드 역할을 맡았었는데 워싱턴 DC 올스타 팀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대학에 농구 장학생으로 진학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꿈이 중간에 수포로 돌아갔다. 어느 날 자신이 피할 수 있었던 자리에 있다가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고 했다. 농구 선수로의 마감을 고할 수 밖에 없는 큰 부상을 입었다.
동생도 한 명 총기 사고로 잃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의 상당 수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범죄에 연루되어 죽었다고 했다. 워싱턴 DC 어느 곳에서든지 볼 수 있는 그런 경우에 속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자랄 때 겪었던 부모 부재의 아쉬움을 이야기 하며 눈물을 흘렸다. 처음 만나는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자신을 보니 그 이야기를 누군가에겐 꼭 했어야 했는데 못하고 속으로 응어리진 채로 가지고만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내가 고맙다고 했다.
자신은 그 후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현재 트럭 운전사로 열심히 일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5명의 애들 모두 친 아버지처럼 돌보고 있고, 다행히 학교에 다니는 4명 모두 공부를 잘 해 주어 고맙다고 했다. 자식들은 자신처럼 힘든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런 삶은 자신의 대에서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했다.
워싱턴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오랫동안 교육 분야에서 일을 했던 나도 가난의 대물림에 대해 많이 고민한다고 이야기 해 주었다. 또한 신문이나 보고서 등을 통해서만 접했던 이야기들을 그러한 삶을 실제로 겪으며 살았던 사람에게 직접 들으니 너무 생생하게 다가온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언제든지 페어팩스 카운티에 와서 시간 여유가 있으면 연락하라고 내 명함 한 장을 건네었다. 한 시간 남짓의 대화, 아니 들은 이야기가 이렇게 진한 여운을 남긴 적도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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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룡 변호사,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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