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세계경제를 짓누르는 고통은 단연 40년래 최고 수준인 인플레이션이지만 이는 고통의 최종 형태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변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한 단면일 뿐일 수 있다. 래리 서머스 전 미 재무부장관은 올 초 전미경제학회에서 지난 10년간 주장해오던 구조적 장기 침체론(secular stagnation)을 공식 철회했다. 구조적 장기 침체론은 투자와 수요가 바닥을 기면서 고질적인 저성장을 겪는다는 1930년대의 이론인데 서머스 전 장관은 2013년 국제통화기금(IMF) 연차총회에서부터 세계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저물가와 저금리·저성장 시대로 다시 진입하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던 그가 팬데믹 이후 상황이 달라져 이제 세계경제는 고금리·고물가로 대변되는 새로운 시대로 변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물가 안정의 선봉장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내부에서도 고물가 고착화 우려가 조금씩 새어나오는 분위기다. 메리 데일리 샌프란시스코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최근 인터뷰에서 세계경제가 고비용 구조로 바뀌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지난 수십 년 동안 세계화와 기술 발전의 영향으로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임금과 물가는 낮게 유지됐다. 수요가 적다보니 각국 중앙은행들은 제로금리 등 성장을 부양하는 데 정책의 초점을 둘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세계의 가격 인하 경쟁은 줄고 있으며 인력 부족이 심화하면서 기업들의 투자비와 생산비가 늘어나고 있다. 수요가 낮아도 공급과 생산 비용 증가로 고물가 시대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뉴욕 연은 역시 지난주 “인플레이션 압력이 생각보다 더 높고 지속적”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표현의 차이일 뿐 세계가 고물가·고금리 시대가 될 것이라는 서머스의 진단과 비슷하다.
1년 반째 이어지는 인플레이션이 고물가 구조의 단면이라면 최근 발생한 실리콘밸리은행(SVB)의 영업정지 사태는 고금리 구조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충격의 파편일 것이다. SVB 사태의 시작점은 예금이다. 2008년 금융위기가 함부로 실행한 대출에서 비롯됐던 것과는 다르다. 이 말은 평상시였다면 문제가 없을 일이 고금리 때문에 문제가 됐다는 의미다. 금리가 올라 기업 고객들의 자금 사정이 악화하면서 맡겨뒀던 예금을 찾기 시작했고 SVB는 이 돈을 내주기 위해 보유 채권을 팔려고 했지만 금리 상승에 따른 채권 가격 하락에 손실을 감수해야만 했다. 현재로서는 SBV 사태의 파장이 어느 정도일지, 유사 사태가 잇따를지 판단하기 어렵다.
만약 고물가·고금리 시대로의 전환과 SVB 사태 악화가 맞물려 돌아갈 경우 상황은 복잡해진다. 제2, 제3의 SVB 사태가 발생한다면 스타트업과 지역 은행 등의 부실로 경제성장은 둔화될 것이다. 이는 경제의 수요 감소를 의미한다. 그런데 수요가 줄더라도 공급망과 인력 등 고비용 구조가 고착되는 것이라면 정작 가격은 크게 하락하지 않을 수 있다. 수요는 줄지만 물가는 높은 상황은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일 수 있다.
SVB 사태가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친다 해도 안심할 수만은 없다. 반도체를 미국에서만 만든다면 아이폰14의 가격이 지금보다 100달러 더 오른다고 한다. 아이폰이 100달러 오르면 다른 스마트폰이나 PC·자동차·전자기기의 가격도 지금과 같을 수는 없다. 이에 여러 직종의 임금구조와 비즈니스 모델 변화도 뒤따른다. 고금리·고물가 시대로의 진입은 곧 세계가 오랜 저금리 관행을 바탕으로 쌓았던 그동안의 경제성과에 대한 도전이 본격화한다는 의미다.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서머스 전 장관을 비롯한 연준 일각의 전망이 틀리는 경우다. 고물가, 고금리, 만성적 인력난이 빠르게 풀리고 여기에 SVB 사태도 파장 없이 마무리될 경우 세계는 골디락스(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적정한 상태) 경제도 노릴 만할 것이다. 이런 달콤한 시나리오를 배제한다면 지금 우리가 겪는 인플레이션 고통이나 SVB 사태는 단 한 번의 이벤트로 그치지 않을 수 있다. 이는 적어도 지난 한 세대간 볼 수 없었던 형태일 것이다. 위기는 매번 다른 모습으로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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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록 서울경제 뉴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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