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노예가 쓴 자서전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을 들라면 프레데릭 더글러스의 ‘미국 노예 프레데릭 더글러스의 일대기’가 첫 손에 꼽힐 것이다. 노예였던 저자가 어떻게 극적으로 탈출해 자유의 몸이 되었는가를 직접 쓴 이 책은 1845년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됐을뿐 아니라 노예제 폐지 여론을 불러일으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메릴랜드 탤봇 카운티의 한 농장에서 백인과 흑인 노예 사이에 태어난 그는 소피아 올드라는 착한 백인 여성의 가노가 돼 글을 배우는 행운을 얻는다. 그러나 그도 잠시 그녀의 남편으로부터 ‘글 공부와 노예는 양립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후 일체의 공부가 금지되지만 더글러스는 이 말을 듣고 “지식이야말로 노예제로부터 자유로 가는 길”이라는 확신을 얻게 된다.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기선과 기차로 노예주 메릴랜드를 탈출, 필라델피아를 거쳐 뉴욕에 도착하는데 성공한다. 그 후 그는 노예제 폐지론자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의 글과 연설을 접하고 노예제 폐지에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며 개리슨 또한 그의 열정과 웅변에 감탄해 적극 그를 지지하기에 이른다.
그는 노예제 폐지 순회 연설을 하는가 하면 첫번째 자서전을 펴내기도 했는데 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돼 유럽에서도 그의 명성이 퍼지기 시작한다. 그는 2년간 영국과 아일랜드에 머물며 노예제가 폐지돼 흑인도 똑같은 인간으로 대접받으며 사는 나라의 실상을 목격한다. 영국의 후원자들은 그의 주인이었던 토머스 올드에게 프레데릭의 몸값을 지불, 그는 공식적으로 자유의 몸이 된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후원자들이 준 돈으로 노예제 폐지를 목표로 한 ‘북극성’(the North Star)이라는 신문을 창간하고 흑인 노예들을 북부로 탈출시키는 조직인 ‘지하 철도’(Underground Railroad) 사업을 후원한다.
그는 또 여성 참정권 요구를 위해 열린 1848년 ‘세네카 폴스 회의’에 유일한 흑인 대표로 참석한다. 그는 여기서 여성 참정권 선구자인 엘리자벳 스탠튼과 함께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며 자기 신문 ‘북극성’ 사설을 통해서도 이를 지지한다.
그는 남북전쟁으로 흑인이 해방된 후에도 차별과 박해에 맞서 싸웠고 1872년에는 평등권당의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기도 한다. 1877년에는 그의 원주인이었던 토머스 올드의 임종을 지키며 화해했고 1895년 77세에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의 장례식장에는 연방 상원의원과 대법원 판사 등이 참석해 공을 기렸다. 그의 묘에는 “탈출한 노예, 노예제 폐지론자, 참정권주의자, 언론인, 정치인, 미국 민권 운동의 창시자”란 비석이 놓여 있다.
그와 동시대인이면서 민권 운동에 그에 못지 않은 공을 세운 인물로 해리엣 텁만을 빼놓을 수 없다. 역시 흑인 노예 출신으로 자신이 태어난 메릴랜드 농장을 탈출한 그녀는 단지 자신과 가족뿐 아니라 다른 노예들에게도 자유를 찾아주기 위해 13차례나 노예주로 돌아와 70명의 흑인 노예를 구출해 냈다.
‘지하 철도’ 운동의 대표적 행동가였던 그녀는 단 한번도 잡히지 않고 이들을 모두 구해 ‘여자 흑인 모세’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녀는 여성이면서도 권총을 가지고 다니며 탈출한 노예들의 마음이 흔들릴 때면 ‘여기서 죽든가 계속 가든가 택일하라’고 요구할 정도로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남북전쟁이 터지자 처음에는 북군의 요리사와 간호사로 참전했다 나중에는 척후로 활약하며 1863년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컴바히 강 전투에 참전해 남부 농장을 급습, 700명의 노예를 구해내는 전과를 올린다.
1869년에는 뉴욕에서 흑인은 반값짜리 화물차로 가라는 차장의 명을 거부하고 강제로 끌어내리는 것에 저항하다 팔뼈가 부러지는 수모를 당한다. 그녀의 이런 저항은 훗날 로자 팍스가 자리를 비키라는 명령에 거부해 민권 운동을 촉발시키는 전례가 된다. 말년에는 수전 앤소니 등과 함께 여성 참정권 운동에 헌신하며 1896년에는 ‘흑인 여성 전국 연합’ 창립 총회에서 기조 연설을 한다.
이런 공로에도 불구, 텁만은 연방 정부로부터 제대로 봉급을 받아본 적이 없으며 오랫동안 연금 등 재정 지원을 받지 못해 곤궁한 말년을 보내다 1913년 91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그러나 그녀는 사후 흑인 민권 운동의 영웅으로 인정받게 된다. 2013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해리엣 텁만 지하 철도 국립 기념비’ 설립을 명령했고 2017년 ‘해리엣 텁만 지하 철도 주립 공원’과 방문자 센터가 메릴랜드에 세워졌다. 2016년에는 20달러 지폐에 노예 소유주이자 상인이었던 앤드루 잭슨 대신 텁만의 초상을 넣기로 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오늘 한인 등 소수계와 이민자들이 누리고 있는 자유와 민권은 이들의 노력과 희생 없이는 불가능했다. ‘흑인 역사의 달’ 2월에 이들의 고귀한 피와 땀을 다시 한번 기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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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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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 도 저질 루저 백인들이 보기엔 흑인이나 동양인이 거기서 거기라고 비웃는걸 특히 트 를 지지 두둔하며 개골대는 어리석은 한인들은 고걸 모르는가봅니다...ㅉㅉㅉㅉㅉ
Thank you for sharing this. 안타깝게도 한국분들이 잘 모르는( 바뻐서?) 너무나도 유명한, 우리도 마땅히 기려야할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