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주는 종일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차이코프스키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 등을 들으며 지냈다. ‘현을 위한 세레나데’는 너무 우울하기 때문에 글로 표현하기는 다소 궁상스럽기조차 하지만 이열치열이랄까, 비가 오기 때문에 오히려 우울한 음악이 위로를 주는, 차이코프스키를 쓰고 싶은 용기가 솟기도 한다. I love Tchaikovsky… 사실 차이코프스키만큼 끝없이 좋아하게 만드는 작곡가도 드물 것이다. 그의 음악은 결코 어렵지 않으며 애수에 찬 선율은 어둠 속에서도 늘 긍정적인 메시지로 우리를 치유의 물가로 인도해 주곤 한다. 굳이 좋게 표현하자면 무릉도원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들려오는 장엄한 폭포 소리와 같다고나 할까. 구김살 없고 솔직하며 어두우면서도 서정적인 서늘함이 부정적인 면이 많은 인생에서 늘 묘한 매력으로 대중에 어필하고 있다.
이 난에서도 많이 소개한 작곡가 중의 한 명이 바로 차이코프스키일 것이다. 그만큼 필자 역시 차이코스프스키를 좋아하며 또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방증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작곡을 전공한 분들에게 차이코프스키에 관해 물으면 대체로 포퓰리즘적인 면이 많은 작곡가라고 말하곤 한다. 즉 작품성보다는 청중의 귀에 듣기 좋도록 과장되고 선율적 덧칠이 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전문가들의 견해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 어필하는 차이코프스키의 인기는 팝스타 이상이다. 차이코프스키만큼 울림이 강하고 풍부한 감성으로 녹아들게 만드는 작곡가도 드물 것이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작곡가 중에서도 늘 ‘톱 3’ 내지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작곡가가 바로 차이코프스키일 것이다.
예전에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이던 시절 차이코프스키를 좋아한다며 인터뷰 기사에 밝힌 적이 있었는데 정명훈 지휘자를 불러들여 서울시향 지휘자 자리에 앉힌 이도 바로 이명박 대통령이었다. 누군가의 음악을 좋아하고 또 사랑할 수도 있지만 ‘I love’라는 표현에 가장 어울리는 작곡가가 있다면 바로 차이코프스키가 아닐지 모르겠다.
차이코프스키의 단점은 지나친 우울증과 동성애 성향으로 인한 굴곡 있는 인생이었다. 밀류코바라는 여인과의 불행한 결혼 생활도 차이코프스키가 남긴 오점 중의 하나였다. 밀류코바의 집요한 구애 때문에 결혼까지 했지만, 동성애 성향이 있던 차이코프스키의 결혼생활이 행복할 리 없었다. 결국 밀류코바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됐고 차이코프스키 또한 평생의 짐을 안고 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모두 차이코프스키를 추앙하며 밀류코바와의 관계를 하나의 해프닝쯤으로 취급하고 있지만 차이코프스키의 입장에선 한 여인을 불행으로 몰고간, 양심적인 죄악을 저지른 범법 행위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이러니는 이러한 불행을 딛고 차이코프스키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이는 다른 동성애자가 아닌 바로 폰 메크 부인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정신적인 사랑, 평생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고 작곡가와 후원자의 관계로서, 오직 편지 속에서만 사랑을 나눴기에 가능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차이코프스키는 밀류코바와의 불행했던 결혼만큼이나 폰 메크와의 관계에서 큰 행복을 느끼게 됐고 1890년 폰 메크의 후원이 끊기자 그 무엇보다도 큰 고통과 절망을 맛봐야 했다. 감동은 늘 진심이 와닿을 때만 가능한 것일 것이다. 한 사람의 팬으로서 단순한 호감을 넘어 일반인 봉급의 몇 배에 해당하는 후원금을 15년 동안 계속할 수 있었다는 것은 결코 아무에게나 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폰 메크는 차이코프스키에게 무려 6천루불(현시세 50만불 정도)을 매년 지불했던 절대적인 후원자로서 폰 메크가 왜 차이코프스키와의 관계를 끊으려고 했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폰 메크와 차이코프스키의 관계야말로 차이코프스키의 예술적 영향력을 엿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하였다. 아무튼 무려 15년간이나 관계를 지속했던 폰 메크의 배신은 그 속사정이야 어떻든 차이코프스키를 절망으로 몰고갔으며 평생의 원망으로 남게 되기조차 했다.
차이코프스키가 남긴 유일한 ‘현을 위한 세레나데’(작품 번호 48, D 장조)는 차이코프스키의 마음을 담은 아마도 가장 차이코프스키적인 작품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포퓰리즘적인 요소도 적고 선율적인 면에서도 기본에 충실한, 매우 수준 높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차이코프스키 자신도 이 작품을 고전미 넘치는 매우 세련된 작품이라고 만족해했다고 한다. ‘현을 위한 세레나데’는 말 그대로 현악기만을 가지고 연주하는 세레나데 형식을 말한다. 차이코프스키는 모차르트를 좋아했으며 늘 모차르트의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뮤직’ 같은 현악 작품들을 동경해 왔었는데 1880년 슬라브적인 분위기를 섞은 자신만의 세레나데를 만들어 스승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에게 선보여 극찬받았다. 폰 메크 부인에게도 “진심에서 우러난 진솔한 감성을 엮어 만든 수작으로 평가하고 싶다”고 쓸 만큼 스스로 만족해했던 작품이라고 한다(연주 시간 약 32분).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 ‘None but lonely heart’, ‘비창’ .. , ‘템페스트’ 등 I love Tchaikovsky… 의 말뜻이 가슴에 전해오지 않는 사람들은 요즘처럼 비가 내릴 때 찬란한 슬픔이 울려오는 차이코프스키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를 들어보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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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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