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가 아무리 추하고 부끄럽더라도 솔직히 시인할 정직성과 참회할 용기, 자신의 것을 사랑할 애정이 없으면 자서전 발간을 단념하십시오.” 이청준의 소설 ‘자서전들 쓰십시다’에 나오는 대필업자 윤지욱이 의뢰인인 피문오에게 대필을 중단하겠다며 보낸 마지막 편지에 등장하는 대사다. 1976년에 발표된 ‘자서전들 쓰십시다’는 추한 과거를 숨기려는 코미디언 피문오와 신념 과잉의 시골 농부 최상윤에게 실망한 대필 작가 윤지욱을 내세워 진정한 반성과 참회의 글쓰기가 무엇인지 회화적으로 풀어낸 연작 소설이다. 마지막 편지에 등장한 대사는 자서전은 개인의 사생활을 넘어 역사적 가치를 지닐 수도 있지만 사실을 왜곡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해 주는 말로 자주 회자되고 있다.
유명인들의 자서전을 출간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특히 정치인들에게 있어서 자서전 출간은 더욱 그러하다. 언론에 의해 편집되지 않고 자신의 메시지를 대중에게 직접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일 뿐 아니라 출간에 따른 수익과 후원금을 보장해 주는 것이 자서전이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자서전 출간은 대중의 관심을 끄는 일종의 정치행위이다. 선거에 앞서 자신과 정책을 홍보하는 수단이고 정치 활동을 마치고 난 뒤 백서적인 성격을 갖는 것도 자서전이다.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만큼 자서전으로 성공한 정치인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가 퇴임 후 출간한 자서전 ‘약속의 땅’은 출간일에만 89만부가 팔려 당시 첫날 판매량으로 신기록을 세웠다. 이 자서전에는 오사마 빈 라덴 사살 작전과 같은 비밀에 쌓였던 내용들이 담겨 대중의 흥미를 끌었다. 2006년 대선 후보 시절에 내놓았던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은 총 330만부가 팔렸다. 2008년 ‘담대한 희망’은 420만부나 팔렸다. 아내인 미셸 오바마와 함께 2018년에 펴낸 자서전 ‘비커밍’도 첫날 72만5,000부가 판매되면서 누적 판매량만 1,000만부가 넘는 자서전계의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른 것이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자서전은 역주행한 사례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부동산 사업가로 이름을 날리던 사업가 시절이던 1987년에 자서전 ‘거래의 기술’을 출판했다. 하지만 정작 대중의 관심을 끈 것은 출간 30여년이 지난 2016년으로 대통령에 당선되면서다. 대통령에 깜짝 당선되면서 자서전의 판매량은 10배 이상 증가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도 자서전을 내놓은 정치인 중 한 명이다. 자신의 철학과 가치관을 담은 ‘조 바이든, 지켜야 할 약속’이란 자서전이 그것이다. 하지만 정치 지지도의 저조 속에 대중의 관심 역시 그리 크지 않은 자서전이 되고 말았다.
한국의 대통령들도 자서전 출간에서 예외는 아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퇴임 후 2년여만에 자서전을 펴냈는데 초판으로 30질 정도 준비했지만 판매는 저조했다. 서거 후 재차 1,000질 한정으로 재출간한 자서전은 완판되며 체면을 차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서전은 서거 1주기를 앞두고 초판 2만부가 출간되었는데 조기 판매되어 김영삼 전 대통령과 비교가 되고 있다.
한국 대통령의 자서전 중 가장 많이 판매된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서전이다. ‘성공과 좌절-노무현 대통령의 못다 쓴 회고록’은 생전의 메모와 대화들을 모은 것으로 10만부가 넘게 판매됐다는 게 해당 출판사의 말이다. 그만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지층이 많다는 것을 증명한 사례다.
이와는 반대로 유명인이나 정치인들의 자서전이 오히려 반감을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 영국 해리 왕자는 자서전 ‘스페어’를 내며 전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자서전 출간 첫날에만 140만권이나 팔리며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일부 서점에서는 ‘오픈런’ 현상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정작 영국인들의 호감도는 판매량과는 반대로 곤두박질쳤다. 영국 온라인 여론조사업체 유고브 조사에 따르면, 해리 왕자 호감도는 24%로 2%P 하락했고 왕실이 자랑스럽다는 답변 역시 55%에서 43%로 감소했다.
한국의 이명박 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자서전은 환영 받지 못한 사례다. 전 대통령의 경우 광주민주화운동을 왜곡, 폄하해 관련 명예훼손 문제로 출판 금지 가처분을 받기도 했다.
보도의 객관성을 위해 기자는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감추어여 한다는 것을 ‘원칙’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때론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전하는 취재원을 만났을때 배운 ‘원칙’을 깨고 그의 ‘자서전을 지면에 쓰고 싶다’는 생각이 요즘 부쩍 든다. ‘자서전들 쓰십시다’를 놓고 ‘자서전을 쓰고 싶다’로 읽는 나의 마음이 나이듦의 신호라는 핀잔을 들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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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상욱 경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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