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지를 상징하는 동물 중 토끼는 가장 사랑받는 동물의 하나다. ‘복돼지’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옥토끼’라는 애칭이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한국에 세워진 우주 항공 체험 과학관 이름이 ‘옥토끼 우주 센터’다.
한국 전래 설화에서 토끼는 단지 귀여울뿐 아니라 권력자의 수탈에 맞서 싸우는 영리한 동물로 그려져 있다. ‘수궁가’에서 용왕이 생명을 연장해 보겠다고 토끼의 간을 가져오라는 명을 내리자 충직한 신하 자라는 속임수로 토끼를 용궁으로 데려오지만 토끼는 이들을 속여 살아난다. 용왕은 탐욕스런 기득권층, 토끼는 약한듯 하지만 지혜로운 민중을 상징함은 말할 것도 없다.
서양에서 토끼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이스터 버니’다. 토끼가 부활절의 상징이 된 것은 오래 전이다. 영어로 부활절을 뜻하는 ‘이스터’(Easter)는 게르만족 ‘새벽의 여신’ ‘에오스트레’(Eostre)에서 왔다. 동쪽을 뜻하는 ‘East’와 어원이 같으며 원래 ‘새벽’이라는 뜻이다.
가장 긴 밤이 끝나고 날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와 함께 낮이 밤보다 길어지는 출발점인 춘분은 고대인들에게 중요한 명절이었다. 그 시작을 알리는 새벽의 빛을 축하하기 위해 고대 게르만족은 4월을 ‘에오스트레의 달’로 부르고 ‘에오스트레 축제’를 열었다.
이 사실은 ‘영국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비드의 ‘시간의 계산’이란 책에 기록돼 있는데 오랫 동안 그 진위 여부를 의심받아 왔다. 이 사실을 적은 기록은 그것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기원 2~3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수많은 비석에서 이 여신의 이름이 발견되면서 이제는 사실로 인정받고 있다. 9세기에 아인하트가 쓴 ‘샤를마뉴 대제의 일생’이란 책에도 샤를마뉴가 앵글로 색슨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대신 그들의 전통을 수용해 4월을 ‘오스타르의 달’로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원래 ‘새벽의 여신’이었던 에오스트레는 나중에 빛과 봄과 다산의 여신으로 변모했는데 봄이 되면 해가 빛나는 낮의 길이가 길어지고 봄이 생육과 번식의 계절임을 감안하면 자연스런 현상이다. 이 에오스트레를 상징하는 동물이 바로 토끼인데 이 또한 봄이 되면 겨우내 굴 속에 숨어 있던 토끼가 들판에 나타나고 왕성한 번식력을 보여주는 점에서 적절한 선택이다.
‘에오스트레 축제’ 기간은 유대교의 유월절, 기독교의 부활절과 시기적으로 비슷하다. 로마가 기독교를 수용하면서 군인들이 널리 믿던 미트라 신의 생일인 12월 25일을 그리스도 탄생일로 정했듯이 게르만족 포용을 위해 이들의 전통 축제일을 부활절로 통합했고 이에 따라 영미권에서는 ‘이스터’, 독일에서는 역시 같은 뜻인 ‘오스테른’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기독교가 일찍 전파된 라틴어권인 이탈리아와 스페인, 프랑스에서는 ‘파스쿠아’ 혹은 ‘팍’이라 부르는데 이는 모두 히브리어의 ‘페삭’에서 기원한다. ‘페삭’은 ‘건너 뛰다’라는 뜻으로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 노예로 있을 때 모세의 지시에 따라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자 죽음의 천사가 이들의 집은 ‘건너 뛰고’ 이집트인들의 장자만 죽였다는 성경 이야기에 근거한다.
요한 복음은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이 예수가 유월절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한 것으로 묘사한 것과는 달리 유월절 전날 성전에서 양이 도살되는 순간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것으로 기술해 예수 자신이 속죄의 제물이었음을 강조한다. 오래 전 도살된 양들의 피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한 것처럼 예수가 흘린 피가 온 인류를 구한다는 것이다.
탄생과 죽음과 부활의 깊은 상관 관계는 기독교의 핵심 진리이자 자연의 근본 원리이기도 하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은 생명체를 죽여 먹지 않으면 살지 못한다. 인간은 누군가의 희생이 없이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40억년 전 바다 속 어딘가에서 일어난 최초의 탄생을 제외한 모든 탄생은 부활이다. 탄생이란 태초의 유전자가 부모의 낡은 옷을 버리고 자식이란 새 옷으로 갈아입고 세상에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 기독교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를 수태한 날이 바로 부활절 기일과 일치한다고 믿고 있다. 생명의 시작과 부활의 상관 관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야훼가 천지를 창조하면서 인간에게 내린 첫번째 명령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였다. 2세를 낳지 않은 종족은 결국 멸종한다는 것은 자명한 진리다. 저출산율 세계 1위의 한국을 비롯 선진 각국은 이 단순한 진리에 눈을 감고 이미 소멸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부활절의 상징이 토끼라는 사실은 토끼가 단지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물이 아니라 생명과 세계의 근본적인 구도의 중심에 있음을 말해준다. 토끼의 해를 맞아 이들 나라 정부와 국민들은 생명 탄생의 깊은 뜻을 다시 한번 새기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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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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