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권의 꽃’ 탈북자 인권운동가·마영애평양순대 경영인 마영애
마영애씨는 쉴새없이 순대를 써느라고 피곤하지만 일이 즐겁다고 한다.
▶LA서 신학교 졸업후 버지니아로 이주하면서 선교·인권운동에 주력
▶생계위해 시작한 순대사업, 뉴욕·뉴저지 체인사업까지
▶지난해 말 봉사활동·탈북자 헌신 공로를 인정받아 미 대통령 표창
마영애, 그녀의 직업을 무엇이라 불러야 가장 적합할까, 탈북인, 성공한 비즈니스 우먼, 탈북자 인권운동가 등등으로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는 마영애, 한국과 미국 대통령, 미국 상하원 국회의원들이 그녀를 만나고 있다.
▲새벽4시 기상
마영애는 새벽 4시40분이면 집에서 나온다, 10분 거리인 순대공장에 가는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순대를 썰었는지 어깨 3곳을 수술했고 왼쪽 손목에는 길다란 수술자국이 있을 정도로 몸을 혹사하며 일해 왔다.
처음 한국에 오면서 ‘앞으로 뭐해 먹고 살지?’ 하던 막연한 심정을 생각하면 아무리 몸이 피곤해도 벌떡 일어나 일터에 나가게 된다고. 열심히 일하다보니 장사가 잘 되고 그 이윤으로 중국과 동남아를 떠도는 탈북자 구출과 후원을 하고 있다.
2006년부터 유엔본부와 북한 대표부 앞에서 북한인권탄압 시위에 앞장서면서 유명인사가 되다보니 탈북인으로서 한국이나 미국의 대통령들을 그녀만큼 많이 만난 사람도 없다.
‘빈손으로 와서 어려운 사람을 무조건 도와준다’는 마음으로 살다보니 상복도 많다. 2014년 미정부 평생 공로상, 2017년 뉴저지버겐카운티 인권상(Human Rights Award), 2019년 도전한국인운동본부 수여 ‘국제인권상’, 2016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 평생공로상, 2017년 미연방 인권상, 2019년 뉴저지 주정부 인권상, 2021년 조 바이든 대통령 표창 등등이다.
지난 12월28일에는 한인업체 마영애 평양순대(대표 마영애)가 코로나 기간동안 마스크 및 세정제 전달 등 지역사회 봉사활동과 탈북자 헌신 공로를 인정받아 미 대통령 표창과 메달을 수상했다. 뉴저지 밥 오스 하원의원이 ‘2022 GOLD MA'S Korean Sausage, LLC' 표창을 전달했다.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강연회 및 간증집회에서는 늘 인기만점이다.
▲무국적자에 불법체류자
1963년 출생으로 평양시 선교구역에서 탈출한 마영애는 아버지는 한의사, 어머니는 충청남도 논산 태생이다. 점잖은 분이라는 기억이 남은 아버지는 8살에, 어머니는 마영애가 군대에 가던 18살에 돌아가셔 부모의 정을 잘 모르고 자랐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배운 국악기 양금과 아코디언 솜씨는 음악을 즐기며 사는 명랑한 성격이 되는데 한 몫 했다.
평양보위부 정보요원으로 주로 중국과 러시아에서 8년간 일하던 중, 중국 동북삼성에 8개 회사를 지닌 성공한 조선족 사업가 백성룡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북한에서 대형 옷 제작 공장을 운영하여 베트남에 수출, 수백만 달러를 벌었지만 보위부가 가로채자 마영애에게 도와달라고 청한다. 이에 도움을 준 그녀는 어느 날 밤, 한통의 전화를 받는다.
고위층 시댁의 긴급전화 한 통으로 그날 밤, 국경을 넘어야 했다. 남편과 8살짜리 아들을 두고 생이별이었다. 중국으로 건너가 숨어다니는데 목단강가에 한국으로 보내주는 조선족 브로커들이 있었다. 그녀는 도문 기차역전 앞 마켓에서 은인을 만났다. 반듯하고 지혜롭게 보이는 마영애를 잘 본 미세스 김은 그녀를 숨겨주고 공안에 체포된 그녀의 석방을 위해 거금도 대신 내주는 등 은혜를 베풀었다.
정착교육이 끝나고 대구의 주유소에서 일하면서 월급을 모아 2개월 후 아코디언을 샀다. 마영애가 국정원 주최 강연회에서 아코디언을 켜며 노래하고 시원시원 말도 잘 하니 완전 인기스타였다.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를 부를 때는 군인들이 엉엉 울었다.
그러다, 2004년 미 의회에 북한인권상황 증언을 하러 왔으나 한국정부에 의해 무산되며 마영애는 불법체류자이자 무국적자가 되었다. 참여정부 시절의 한국은 북한과의 교류가 급했던 것이다. 그녀는 2006년 한국정부의 인권탄압을 이유로 망명신청을 했다.
가슴에 단 태극기는 어머니의 태를 묻은 조국 대한민국이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정착 교육과정으로 교회에 가서 찬양을 하던 중 처음 듣는 노래인데 자신이 그 노래를 안다는 것을 느꼈다. 어릴 적에 어머니가 아기 마영애를 안고 흥얼흥얼 거린 노래가 바로 찬송가였던 것, 어머니가 크리스천이었구나 하는 자각 후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LA 세퍼드대학과 세인트 미션대학에서 음악과 선교학 박사, 2018년 목사 안수를 받았고 세계선교단체 총재인 호성기 목사(필라 안디옥 교회)의 PGM 파송 선교사로도 일했다.
그동안 생업과 학비를 벌고자 한인타운 8가에 마영애 평양순대 식당을 운영했다.
“정착 교육을 받으면서 만난 남편과 평양에서 생이별 5년만에 데려온 아들, 이렇게 세 명이 사는데 처음엔 집세 내기도 힘들었다. 북한에서 하는 대로 찹쌀과 멥쌀을 넣고 만든 순대가 ‘밥을 씹어 먹는 것 같다’는 말에 멥쌀을 빼고 찹쌀을 갈아서 야채와 당면을 넣자 ‘맛있는 평양 순대’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고 한다. 신학교 졸업 후 버지니아로 이주하면서 선교활동과 인권운동에 주력했다.
특제 순대소스는 마영애가 직접 만들고 남편 최은철은 공장 책임자로, 아들은 총 매니저로 온 가족이 마영애평양순대 체인사업을 한다. 지난 2017년 오픈한 뉴저지 리지필드 팍에 공장이 있고 뉴욕과 뉴저지 마켓 2곳을 비롯 수많은 개인식당에 순대를 납품한다. 한달에 최소 10톤 정도 순대가 나간다.
“처음에 선교나 탈북인 돕기에 돈이 없으면 순대를 도네이션했다. 내가 만든 특제 소스는 ‘고기가 땡기는 소스’라고 자랑하는 그녀는 ”내가 번 돈으로 탈북인 돕기와 선교활동을 할 수 있으니 너무 고맙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 탈북자들이 그녀를 훼방하며 ‘마영애 평양순대’를 흔들려고 하는 민사형사 소송이 일어났었지만 법정은 마영애의 손을 들어주었다.
오랫동안 브롱스 마켓에서 순대 재료인 육류와 야채 등 여러가지를 구입해 왔는데 새벽 눈길에 교통사고가 나는 등 말 못할 고생을 했다. 요즘은 모든 재료를 딜리버리 받는다. 1남2녀의 손주를 둔 마영애는 나이가 무색하게 젊고 옷도 젊게 입는다. 뭐든 열심히 하는 마음이 젊은 것이다.
▲2023년 계획
오는 4월이면 미국에 온 지 20년이 된다는 마영애, ‘어느 한 순간도 한국을 잊어본 적이 없다’며 ‘어머니의 태를 묻은 그곳이 나의 조국이다. 늘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다닌다.’고 말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북한인권운동가로 취임식에 초청해주었고 이명박 대통령은 대한민국 여권을 재발급 해주었다.
“다른 탈북인들은 가족에게 돈을 보내고 돈을 모아 한국에 데려오려고 애쓰지만 나는 돈을 벌어도 보내줄 가족이 없다, 이래도 저래도 하나님 은혜를 많이 입었다. 그래서 주위 어려운 이들을 더욱 많이 돕고자 한다.”는 것이 올해의 계획이다.
그동안 마영애가 자유를 찾게 해 준 탈북자 수는 엄청난 숫자다. 이 모든 비용을 자신이 기꺼이 지불하고 있다. 그녀는 미국에서 받은 은혜를 사회에 돌려주고자 무보수 자원봉사에 앞장서고 있다. 2023년도 새해, “뭘 도와드릴까요?” 그녀에게서는 스스럼없이 이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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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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