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8일 초기 록큰롤 음악의 전설 인물 중에서 마지막 생존해 있던 Jerry Lee Lewis가 우리 곁을 떠났다. 노래할 때 Wild(거칠고)하게 불러 팬들을 Crazy(미치게)하게 만드는 그는 그의 팬들을 광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인도하는 마법의 힘을 가졌다.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 공헌 그리고 업적을 하나씩 살펴보자.
1935년 루이지애나주 Ferriday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 성장했다. 유년 시절 사촌들과 함께 피아노를 배웠다. 이것이 그의 운명을 바꾼 계기가 되었다. 피아노에 흠뻑 빠진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농장을 담보로 하여 대출을 받아 피아노를 사주었다. 피아노 연주에 몰두한 그는 나이 14세 때 고향에서 칸츄리 밴드 팀과 함께 자동차 대리점 판촉을 위해 첫 연주회를 가졌다.
어머니는 그를 위해 텍사스주에 위치한 Southwest Bible Institute 학교에 입학시켰다. 어느 날 정규 예배 시간에 학생회장 추천으로 그는 단독 복음성가를 부를 기회를 가져 단상에 올랐다. 모두들 엄숙한 성가를 기대했다. 복음성가 My God Is Real을 자신이 편곡한 칸츄리 음악의 일종인 ‘ 부기-우기’ 스타일로 흥겹고 떠들썩하게 불러 모두들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예배시간은 한동안 수라장이 되었다. 그 다음날 학장은 학생회장과 Jerry Lee Lewis에게 퇴교를 통보했다.
학교를 떠난 그는 본격적으로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그런 후 테네시주 내쉬빌에 갔으나 별로 환영받지 못하자 1957년 Sun Record 회사를 찾아갔다. 이곳은 테네시주 멤피스에 소재한 조그마한 소규모 기업이지만 Elvis Presley가 처음으로 이곳에서 녹음하여 유명하게 된 곳이다. 사장인 Sam Philips는 출장 중이고 대신 레코드 담당 프로듀서가 대신 오디션을 진행했다. 그는 ‘Crazy Arms’와 자작곡 ‘End Of The Road’를 녹음했다. 출장에서 돌아온 사장은 데모 테이프를 들은 후 만족을 표시하고 즉시 판매에 들어갈 것을 지시했다. 남부 몇 개의 주에만 판매를 했는데도 300,000장을 판매하여 좋은 성적을 달성했다. 이후 그는 Sun Records 회사 일원이 되어 같은 소속 가수들인 Jonny Cash, Carl Perkins의 녹음시 피아노 반주를 담당했다.
그해 12월 바쁜 한 해를 보낸 Elvis Presley는 자신의 성공을 도운 Sun Records 회사를 인사차 방문했다. 마침 그때 Carl Perkins가 Jerry Lee Lewis 피아노 반주로 레코드 녹음을 하고 있었고 옆에선 Johnny Cash가 구경하고 있었다. 갑작스런 엘비스의 방문에 모두들 새로운 수퍼 스타를 환영하고 다같이 즐거워 함께 노래하기 시작했다. 4명이 즉흥적으로 노래하는 모습을 본 사장은 레코딩 테이프를 돌렸고 이들은 그것을 모른 채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이들이 부른 노래는 복음성가를 비롯하여 Don’t Be Cruel, Don’t Forbid Me, Brown Eyed Handsome Man, Too Much Monkey Business 등이다. 이 즉흥 해프닝이 향후 불멸의 음반이 될 거라는 사실을 아무도 예상못했다. 세월이 흘러 Sun Records 회사는 ‘The Million Dollar Quartet’란 타이틀로 레코드를 발매했다. 1957년 들어 Jerry Lee Lewis는 록큰롤 음악 역사상 기념비적인 노래 ‘Whole Lot Of Shaking Going On’과 ‘Great Balls Of Fire’를 발표한다. 이 두 곡은 전세계 팬들을 열광시켰고 록큰롤 음악의 방향을 바꿔 놓았다.
또한 그가 노래하면서 연주하는 피아노 펌핑 스타일은 새로운 혁명이었다. 그는 가는 공연장마다 팬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만큼 대단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가 발표한 결혼 소식이 세상을 아연하게 만들었다. 그가 22세 때 결혼할 상대는 자신의 사촌인 Myllene Brown. 그녀의 나이는 불과 13살로 미성년자이자 사촌간이라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혼 발표 이후 상황은 매우 악화되어 그의 모든 공연은 취소되고 방송 금지도 뒤따랐다. 한순간에 그는 부와 명예를 잃고 설 자리가 없었다.
몇 년간의 공백기를 가진 후 그는 유럽 투어를 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넜다. 유럽의 젊은이들은 그의 콘서트에 몰려들어 열성적으로 노래하는 그를 뜨겁게 환영했다. 특히 1964년 독일 함브르크에 있는 스타 클럽에서 가진 콘서트는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공연 중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어느 평론가는 “그의 공연은 다른 공연자들을 모두 압도해 모두들 죽였다”고 평했고, 그로부터 그의 별명은 ‘The Killer’라고 불리웠다.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작곡가이자 가수인 ‘Elton John’이 인터뷰에서 “전 피아노를 칠 때 차분히 앉아 침착하게 쳐야 한다고 배워왔다. 헌데 Jerry Lee Lewis는 일어서서 건반을 두드리고 이것도 모자라 아예 피아노 위에 올라가 마음껏 자유자재로 연주했다. 그리고 왼손으로 베이스와 댄싱 비트를 치는 것을 보고 나도 피아노 치는 방식을 바꿨다”고 말했다. Elton John뿐만 아니라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손목, 엘보, 발 등 신체 모든 분야를 동원하여 연주하고 신이 나면 피아노 위에 올라가 연주하기도 했다. The Killer란 별명을 가진 그는 기존 룰에 반항하여 스스로 외로운 길을 걸었지만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 그리고 업적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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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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