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과 게임 사이, 나는 언덕에 누워 있었다. 스탠퍼드 대학 운동장에서 맞이한 구름기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은 나를 압도했다. 포근하게 불어오는 팔로알토의 바람은 한 주간 쌓인 근심을 살포시 날려줬다. 나는 공을 치지 않는 대신 공을 찬다. 미국에 오고나서 수소문 끝에 가입한 축구클럽의 이름은 ‘꿈하나’다. 얼핏 우아하고 낭만적으로 들리는 이 클럽의 이름이 사실 매우 실리콘밸리답다고 생각한다. 꿈하나에서 하나는 십진법이 아니라 컴퓨터에서 사용하는 이진법(binary)의 수라고 나는 해석하기 때문이다.
꿈은 왜 0 아니면 1이어야 하는가. 불혹을 바라보는 시점, 나이가 들수록 꿈의 크기가 작아지는 것을 느낀다. 십진법으로 계산하면 9나 다름없던 나의 꿈이 0에 가깝게 수렴하고 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아직도 환상에 젖어 꿈의 크기를 키우기보다는 꿈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꾼다. 꿈은 내용과 형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꿈꾸는 혹은 꿈꾸지 않는 행위가 본질일 것이다. 어떤 이는 꿈꾸며 산다. 어떤 이는 꿈을 잊고 산다. 전자에게 꿈은 1이고 후자에게 꿈은 0이다. 꿈은 컴퓨터의 전원 버튼과 같다. 누군가에게는 켜져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꺼진 채로 잠들어 있다. 따라서 ‘꿈하나’를 영어로 표현할 때 직역하면 ‘드림원(DreamOne)’이 되겠지만 의역하면 ‘드림온(DreamOn)’도 성립할 것이다.
팔로알토에서 하늘과 바람에 취한 채 나는 스탠퍼드 대학 출신 인물을 한 명 떠올렸다. 2016년,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문학도이자 의사인 폴 칼라니티(Paul Kalanithi)다. 나는 칼라니티를 만난 적이 없지만 그가 자신의 죽음을 기록한 책 <숨결이 바람 될 때>를 아주 인상깊게 읽었다. 최근 10년 간 내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준 책을 하나만 꼽으라면 아마도 <숨결이 바람 될 때>와 월터 아이작슨이 쓴 <스티브 잡스> 전기 중에서 한 권을 선택할 것이다. <숨결이 바람 될 때>의 원제는 ‘When Breath Becomes Air’다. 폴 칼라니티는 더이상 스탠퍼드에, 아니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지만 나는 팔로알토의 선명한 공기에서 그의 숨결을 느끼려 애썼다.
폴 칼라니티는 스탠퍼드 학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석사 학위까지 받았다. 이후 ‘생물학, 도덕, 문학, 철학이 교차하는 곳은 어디인가’라는 자신의 깊은 고민 끝에 예일대 의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졸업 후 스탠퍼드로 돌아와 대학병원 신경외과 레지던트 생활을 하며 본격적으로 의사의 길을 걷던 중 암을 발견한다. <숨결이 바람 될 때>는 의사이자 환자로서, 문학도이자 철학도이자 의학도로서 죽음을 앞두고 폴 칼라니티가 자신을 대면한 기록이다. 내게 가장 큰 울림을 준 부분은 두 개의 다른 영역에서 깊은 사유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교차점을 찾으려 노력한 그의 시도였다. 특히 “우리는 결코 완벽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거리가 한없이 0에 가까워지는 점근선처럼 우리가 완벽을 향해 끝없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있다”고 번역된 그의 문장은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았다.
폴 칼라니티는 일생동안 문학·철학과 과학·의학 사이에서 접점을 찾으려고 애썼다. 어느새 칼라니티보다 물리적으로 긴 인생을 살고 있는 나의 현재는 무엇인가. 칼라니티만 좇을 게 아니라 내친 김에 내 주제(theme) 파악도 해야겠다. 실리콘밸리에서 2년째 시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내가 스스로 부여한 과제는 인간·문화와 과학·기술 사이의 교차점을 나만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나는 실리콘밸리를 새의 눈이 아니라 벌레의 눈으로 바라보고 싶다. 실리콘밸리에 대한 거시적 접근과 거대담론은 차고 넘치도록 많다. 커다란 남 얘기에 숟가락을 얹을 것이 아니라 작지만 의미있는 내 이야기를 만들어보자고 다짐한다. 다행히 올해 초, 소소한 전기를 마련했다. 샌프란시스코 베이에어리어 100마일을 걸으면서 실리콘밸리를 관념이 아닌 실재로 인식할 수 있었다. 엘카미노 레알 길을 따라 걸어내려 오면서 지나친 팔로알토의 공기에는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들어있었을 것이다.
나는 실리콘밸리라 불리는 지역의 공기(atmosphere)가 나의 숨결이 되기를 바란다. 관건은 실리콘밸리의 유행을 좇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하려는 실리콘밸리의 마음을 체화하는 것이다. 어느새 3년 임기 중 2년이 지나갔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부수적인 가지를 쳐내고 본질적인 뿌리에 집중해야 할 시점이다. 어쩌면 1년 이내에 만족할 만한 지점에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폴 칼라니티의 문장에서 다시금 위안을 얻는다. 거리가 한없이 0에 가까워지는 점근선처럼 내가 원하는 지점을 향해 끝없이 다가가고 있다고 믿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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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진 (KOTRA 실리콘밸리무역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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