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폴트 공포 커지는 신흥국
▶ 킹달러에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 등 신흥국 자산시장서 자본 엑소더스, 자금 조달 길 막혀…IMF 대출 급증
G20, 국가부채 구제 힘 모은다지만 채권국들 간 협력은 ‘제자리 걸음’, “전세계 경제 큰불로 번질것” 경고
신흥시장 중심의 자산운용사인 애시모어는 최근 관리 자산 규모가 3분기에만 80억 달러(약 11조 5,400억 원) 감소했다고 발표했다. 투자 실적 자체가 하락한 것도 문제지만 감소분의 60%인 50억 달러는 투자자들이 자본을 빼내면서 발생했다. 애시모어의 마크 쿰스 최고경영자(CEO)는 “지정학적 위험과 높은 인플레이션, 점점 더 매파적 성향을 띠는 각국 중앙은행들의 행보로 경제 불확실성이 이어지면서 자산이 감소했다”고 설명했다.
주요국의 경제 변동에 취약한 신흥국들이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기준금리 인상이 근래 보기 드문 강달러를 유발하자 아시아와 아프리카·중남미에 이르는 신흥국 자산 시장에서는 자본 유출이 멈추지 않고 그동안 늘어난 달러화 부채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연준발(發) ‘킹달러’가 글로벌 경제의 전통적 약한 고리인 신흥국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신흥국 위기는 다시 글로벌 경제를 뒤흔드는 뇌관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올 들어 나타나는 신흥국 시장의 자본 유출은 이례적인 수준이다. JP모건은 올해 초부터 투자자들이 이머징마켓 채권펀드에서 빼낸 자금이 700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한다. 이는 JP모건이 관련 수치를 집계하기 시작한 2005년 이후 최대 유출 규모로, 올해 말까지 순유출 금액은 800억 달러로 불어날 것으로 예측된다. 핌코의 이머징마켓 책임자인 프라몰 다완은 “지금까지 시장에서 본 적이 없는 최악의 자금 유출”이라고 말했다. 금융 서비스 업체인 리피니티브리퍼는 올 들어 3분기까지 글로벌 채권펀드에서 1,755억 달러가 빠져나갔으며 이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800억 달러가 이머징마켓에서 유출됐다고 집계하기도 했다.
이처럼 기록적인 자금 유출은 투자자 손실 차원을 넘어 신흥국 정부와 공공기관, 기업의 자금 조달 길이 막히고 있음을 의미한다. 시장의 외면을 받는 신흥국들은 신규 채권 발행의 표면금리를 높여도 자금 조달에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해진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아프리카 가나의 경우 2016년에 10년 만기 자금을 조달하는 데 8%의 이자를 줬지만 현재는 조달 금리가 35%까지 뛰었다. 플루토인베스팅의 제이컵 산스버리 CEO는 “높은 부채 수준과 이자율 상승으로 신흥국 정부의 채무 상환 능력에 대한 의구심이 커졌다”며 “그 결과가 바로 우리가 지켜보고 있는 대규모의 자금 유출”이라고 설명했다.
신흥국의 채무 부담은 어느 때보다 커진 상태다. 우선 달러 빚 자체가 많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2006년 1조 달러 수준이던 전 세계 신흥국의 달러 부채는 이후 저금리 기조를 타고 급격히 늘어 현재 4조 달러를 넘어섰다. 여기에 달러화 강세가 겹치자 채무국들의 부담은 크게 증폭됐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튀르키예의 경우 올해 들어 리라화 가치가 달러 대비 30% 하락했다. 이는 달러 채무액이 지난해와 동일하더라도 튀르키예 정부가 지급해야 할 채무 부담은 30% 늘어났다는 의미다.
디폴트(채무 불이행)도 현실화하고 있다. 이미 스리랑카가 5월 극도의 경제난 속에 건국 후 첫 디폴트를 선언했으며 이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가 줄줄이 디폴트에 빠졌다. S&P글로벌은 아르헨티나와 레바논·가나·수리남·잠비아·에티오피아·부르키나파소·콩고공화국·모잠비크·엘살바도르 등 10개국이 추가로 디폴트에 처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이들 국가의 상당수는 강달러로 물품 수입이 어려워지면서 생활필수품도 구하기 힘든 상황이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IMF 총재는 “강달러와 고금리가 결합해 펀더멘털이 취약한 신흥국과 저소득 국가가 상당한 타격을 입고 있다”며 “필연적으로 (추가적인) 디폴트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자금줄이 마른 신흥국들이 앞다퉈 IMF에 손을 내밀면서 IMF 대출도 급증했다. IMF는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총 93개국에 2,580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했으며 올 2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내놓은 지원 약속만 16개국, 총 900억 달러에 달한다. 구제금융을 결정한 뒤 실제 집행한 대출 총액은 지난달 말 기준 1,350억 달러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일각에서는 이들의 부채 탕감을 위한 새 국제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실효성은 불투명하다. 이미 2020년 주요 20개국(G20)이 국가부채 구제를 위한 공동 프레임워크를 마련했지만 채권국들 간 협력이 이뤄지지 않아 현재까지 완료된 사례는 한 건도 없다.
그러는 사이 신흥국 위기의 불길은 날로 거세지고 있다. 신흥국은 개별 국가의 경제 규모는 작지만 어느 한 나라에서 위기가 터지면 신흥국 시장 전반으로 전이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글로벌 경제에 미칠 타격은 적지 않을 것으로 우려된다. 핌코의 전 CEO이자 퀸스칼리지 총장인 모하메드 엘에리언은 신흥국 위기와 관련해 “현재 세계는 곳곳에 작은 불씨가 있다”며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이들은 훨씬 더 큰 불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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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김흥록 특파원·조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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