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취임한지 채 한달도 안 돼 사고를 쳤다. 아마도 역대 최단시간에 나온 정치적 실착일 터이다. 물론 그녀는 부정적인 시장의 반응으로 정책 U-턴을 강요받은 첫 번째 정치 지도자는 아니다. 그러나 경제 정책을 발표한지 10일 만에 핵심조항들을 포기한 것은 분명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필자처럼 중도좌파에 속한 사람들이 그녀의 불행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것을 탓해선 안 된다. 보수주의자들은 공공지출이 늘어날 기미만 보여도 곧바로 금리를 밀어 올리는 ‘채권 자경단’에 의해 진보적 정책은 늘 심각한 타격을 입기 마련이라고 경고한다. 그 같은 경고는 대개 빗나간다. 그런데 이번에 영국에서 채권 자경단이 실제로 모습을 드러냈다. 트러스 정부가 경제 정책을 발표하자 금리가 치솟았다. 그러나 시장이 과잉 지출에 반응한 게 아니었다. 금융시장을 뒤흔든 동인은 무책임한 감세였다. 하지만, 트러스가 예산적자와 인플레이션을 부추길 정책안을 제시하자, 금리가 뛰고 파운드화 가치가 폭락하는 등 시장이 요동을 쳤다는 식의 설명은 지나치게 도식적이다. 이건 단순히 달러와 센트 (혹은, 파운드와 펜스)가 아닌 정부의 지적·도덕적 신뢰성의 추락에 관한 문제다.
트러스가 제안한 감세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그녀와 정부 관리들은 감세로 인한 세수감소 예상치 조차 제시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영국의 싱크 탱크 ‘레졸류션 파운데이션’은 트러스의 감세 규모가 5년간 1,460억 파운드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같은 기간 국내총생산(GDP) 전망치의 1% 정도다. 결코 적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대단히 방대한 규모도 아니다. 게다가 전체 감세안의 일부인 최고세율 인하안은 발표되기 무섭게 폐기됐다.
그렇다면 시장이 그토록 맹렬한 반응을 보인 이유가 무엇인가? 부분적인 이유는 최고세율 인하가 경제성장에 큰 힘을 보탤 것이라는, 이미 신용을 잃은 철 지난 주장으로 트러스와 쿼지 콰텡 재무장관이 그들의 계획을 정당화하려 했고, 결국 이 때문에 그들의 능력과 현실감각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집권당이 종말론을 신봉하는 집단처럼 무분별하게 행동한다는 금융 전문가들의 지적은 금융시장에 악재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트러스의 판단력에 대한 의문은 정책안의 어이없는 타이밍으로 더욱 강화됐다. 지금 영국인을 비롯한 평범한 유럽인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간접적 영향으로 너나없이 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상대로 믿을 수 없는 승리를 이어가고 있는 데에는 서방국들이 지원한 무기가 큰 역할을 했다. 이에 맞서 블라디미르 푸틴은 천연가스 송출을 중단하는 것으로 서방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
러시아산 천연가스 공급 차질은 유럽인들에게 1970년대의 오일쇼크보다 더 큰 충격이다. 유럽 각국은 치솟는 에너지 가격이 초래한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국가들이 전쟁에 맞먹는 경제 위기에 직면한 셈이다. 이처럼 전시를 방불케 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정부의 정책은 유럽인 모두가 고통을 함께 한다는 연대감을 불어넣어주어야 한다.
이런 시점에 저소득층보다 에너지가격 상승에 따른 부담이 덜한 부유층의 세금을 깎아준다는 발상은 힘없는 서민만 고통을 감내해야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의료보장을 비롯한 공공서비스 축소에 가뜩이나 불만을 느끼는 영국의 대중이 부유층 세금 삭감이 아닌 인상을 원하는 시점에 대기업과 소득 최상위 그룹의 세금부담을 오히려 덜어준다는 정부의 메시지는 심각한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고, 대다수 국민의 화를 돋운 정부는 불신의 덫에 치이기 마련이다.
정부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킨 트러스의 제안이 금융시장의 패닉을 불러온 데에는 또 하나의 요인이 작용했다. 금리상승과 채권가격 하락으로 어마어마한 양의 영국 국채를 사들인 연금 펀드들의 부채가 증가하자 투자은행들은 사전에 합의된 헤징 전략에 따라 이들에게 자산매각을 통해 늘어난 부채 리스크 상쇄에 필요한 현찰을 추가담보로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갑자기 치솟은 금리로 추가 담보금을 마련하지 못한 펀드사들은 보유자산인 국채를 대량 매각해야 할 처지에 놓였고, 채권시장은 삽시간에 패닉상태에 빠졌다. 이들이 보유 채권을 쏟아놓으면 금융시장이 흔들리면서 금리가 추가 상승압박을 받는 것은 물론 경제 전체가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결국 영국 중앙은행의 긴급 개입으로 최악의 사태를 피했지만 대중의 불안감은 커졌다.
지구촌 곳곳에서 이자율이 오르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또 다른 금융위기가 닥치지 않을지 우려한다. 영국 채권가격의 폭락은 예외적인 일이지만 2008년도의 금융위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마음을 놓지 못한다.
다시 트러스의 실착으로 돌아가자. 필자가 말했듯 신임 총리의 계획에 대한 시장의 격렬한 반응은 단지 돈 때문이 아니다. 어려운 시절의 지도자들은 현실적이고 공정하다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영국은 현실과 유리된 환상의 세계에 살면서 사회적 유대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지도자를 갖게 됐다. 단 며칠 사이에 그녀가 입힌 국가적 상처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크루그먼은 현재 뉴욕 시립대 교수로 재직중이며 미국내 최고의 거시경제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MIT에서 3년 만에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뉴욕타임스 경제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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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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