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층이 모이는 곳에 가보면 거의 예외 없이 ‘여인천하’다. 노인아파트에 가도 은퇴커뮤니티에 가도 여성들이 눈에 띄게 많다. 교회에서도 노년층은 대부분 여성이다. 부부가 해로하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쪽은 대개 남편. 집집마다 아내만 남으니 여성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수적으로 적어진 노년기 남성은 일종의 희소가치를 누리기도 한다.
언젠가 나이 지긋한 주부들이 모여서 ‘아무 것도 못하는’ 남편 걱정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챙겨주지 않으면 남편은 물 한잔도 못 마시고, 양말도 못 찾아 신는다. 내가 (남편보다) 오래 살아야 할 텐데…” 라는 걱정이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한 친구가 말했다. “전혀 걱정할 일 없다. 남편이 혼자되면 당장 그 다음날부터 누군가가 열심히 챙겨줄 것이다.”
노인아파트에서 남성이 사별하고 나면 아파트 문턱이 닳는다는 말이 있다. 이웃에 혼자 사는 여성들이 너도 나도 음식을 해다 나르기 때문이다. 노년에 남성이 홀로 되면 평생 못 누려본 인기를 뒤늦게 누리기도 한다. 물론 전제조건은 있을 것이다.
젊어서 없던 특이한 현상이 노년에 나타나는 원인은 수명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기대수명이 길어서 생기는 일들이다. 미국에서 전체 인구 중 남성은 49%이다. 하지만 65세 이상 인구 중에서는 57%가 여성이다. 80대 이후로 넘어가면 성별 생존율 격차는 더욱 커진다. 80세 이상 고령층 중에서 남성은 여성의 절반, 100세 노인들 중에서는 81%가 여성이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100세 이상 고령인구 중 남성은 불과 13.5%, 여성이 86.5%를 차지한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수명이 긴 것은 거의 모든 문화권, 모든 시대를 통틀어서 한결같다. 기록보관이 잘 되어있는 스웨덴의 경우를 보면, 1800년 출생자의 기대수명은 여성 33세, 남성 31세였다. 지금은 여성 84세, 남성 80세. 여성이 남성에 비해 대략 5% 더 산다는 점에서 변함이 없다. 왜 여성은 오래 살까. 왜 남성은 여성에 비해 수명이 짧을까. 가장 쉬운 접근법은 남성과 여성의 전통적 역할에서 찾는 것이다. 남성들이 가장으로서 가족 부양하느라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심신을 혹사한 결과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지금은 세상이 바뀌었다. 부부가 공히 가족부양 책임을 진다. 게다가 여성들은 직장일에 더해 육아와 가사노동까지 거의 전담하느라 스트레스가 남성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남성들의 스트레스 해소책, 과도한 음주와 흡연이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폭음과 줄담배로 유명한 러시아의 남성들은 여성들에 비해 기대수명이 10년 이상 짧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술 담배 입에도 안대는 인간의 사촌들을 보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침팬지나 고릴라 오랑우탄의 세계에서도 암컷은 수컷에 비해 오래 산다.
그중 설득력 있는 분석은 어머니로서 여성의 역할이다. 장장 9개월 태아를 몸 안에 품어 기르고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출산 트라우마를 겪고도 벌떡 일어나 아기에게 젖을 물리도록 여성의 몸이 강인하게 진화한 덕분이라는 것이다. 남성은 경험하지 못하는 육체적 도전을 감당하면서 강하고 참을성 있는 존재로 단련된 것이 장수효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남성과 여성을 가장 확실하게 가르는 것은 성호르몬이다. 모든 생명체의 존재 이유는 종족번식, 후손이 살아남는데 진화의 초점이 맞춰져있다. 성호르몬은 종족번식의 핵심이다. 남성이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남기려면 가장 필요한 것은 성적 매력이다.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이 펑펑 나와서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테스토스테론은 충동적이고 모험적이며 순간적으로 강력한 힘을 분출하게 함으로써 남성적 매력의 근원이 된다. 하지만 대가가 있다. 심장질환 위험을 높이고 면역력을 떨어트려 감염병과 암 발병 위험을 높인다.
반면 여성호르몬 에스트로젠은 항산화 효과가 있다. 세포에 해로운 화학성분들을 걸러내는 작용을 한다. 여성의 몸을 오래 젊고 건강하게 지켜주는 비밀병기이다. 후손을 잘 키우라는 유전자의 명령이 담겨있다.
아울러 남성과 여성을 가르는 것은 염색체. 인간의 염색체 23쌍 중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는 성염색체가 여성은 X 두개, 남성은 X와 Y 각 하나씩이다. 여성의 염색체는 이중구조이니 하나가 잘못되면 나머지 하나가 보완을 한다. 반면 그런 보완 장치가 없는 남성은 세포에 이상이 생기면 대책이 없다. 나이 들수록 이상 세포들이 늘어나면서 질병 위험이 높아진다.
여성에게는 생물학적 이점이 또 있다. 생리 중 여성의 심장은 박동이 빨라져서 가벼운 운동을 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만들어낸다. ‘조깅하는 여성심장’ 가설이다. 그 결과 심혈관계 질환 위험이 생의 나중으로 미뤄진다.
여성의 장수 비결은 진화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종족번식에서 남성은 일회용, 여성이 주인공이다. 여성이 건강해서 후손의 안녕이 보장되도록 우리는 진화한 것 같다. 남성들은 자신의 몸에 어떤 건강상의 위험이 내재되어 있는지를 인식해야 하겠다. 건강식, 운동 그리고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화목한 관계로 격정의 젊은 날 테스토스테론이 남긴 자취들을 지워나가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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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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