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승과 제자 할리웃보울 무대에 나란히
▶ 이츠하크 펄먼·랜들 구스비 협연 ‘감동’
■김종하 기자의 클래식 풍경
이렇게 완벽할 줄 몰랐다. 스승과 제자의 호흡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현존하는 최고의 바이올린 대가의 한 명인 이츠하크 펄먼과 미 클래식계의 떠오르는 신성 랜들 구스비가 함께 선 무대는 정말 특별했다. 마치 할아버지와 손자처럼, 두 세대를 뛰어넘어 하나가 된 두 버추오소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연주는 그 어디서 쉽게 만날 수 없는 감동으로 가득 찼다.
지난 13일 할리웃보울에서 ‘이츠하크 펄먼이 이끄는 차이코프스키(Itzhak Perlman Leads Tchaikovsky)’라는 주제로 펼쳐진 공연은 할리웃보울 설립 100주년 기념 시즌의 대미를 장식하는 클래식 무대의 하나로 손색이 없었다. 펄먼과 구스비의 합주는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경지였고, 펄먼이 지휘봉을 잡은 LA 필하모닉의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은 타이트한 노장의 지휘봉 아래 꿈틀거리는 감정과 격렬하고도 활기찬 연주의 조화가 돋보였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완벽한 호흡을 보여준 이츠하크 펄만과 랜들 구스비. [할리웃보울 제공]
이날 공연의 1부 곡은 바하의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Concerto for Two Violins, BWV 1043)이었다. 줄리어드에서 펄만에게 사사한 구스비는 그의 수제자임을 입증이라도 하듯 스승과 함께 바하를 완벽한 호흡으로 연주했다. 채 20분도 되지 않는 비교적 짧은 곡이어서 감탄 속에 빠져 들은 연주는 마치 금방 끝나버린 듯 했다.
이렇게 짧은 곡 하나로 연주를 끝낼 리 없다는 기대는 쏟아지는 박수 속에 앙코르 연주로 이어져 객석에서 환호와 갈채가 터져 나왔다. 앙코르 곡도 역시 바로크였다. 펄먼과 구스비는 바로크 시대 프랑스의 대표적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장 마리 레클레어의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E단조’ 2악장 ‘가보트’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선율을 역시 완벽한 호흡으로 들려줬다.
올해 77세의 펄만의 대가다운 면모는 항상 특유의 위트와 유머로 친근하게 관객들에게 다가가는 모습에서 느낄 수 있는데, 이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하 연주가 끝난 뒤 마이크를 잡고 “곡이 너무 짧죠?”라며 마치 예정에 없이 즉흥적으로 앙코르 곡을 고른 것처럼 구스비에게 “사이트 리딩(처음 접하는 곡을 악보를 보고 바로 연주하는 것) 해볼래”라고 농을 던져 관객들을 웃겼다.
이날 앙코르 곡의 작곡자인 레클레어는 2번째 결혼에 실패하고 이혼한 뒤 파리 근교의 집에서 혼자 살다가 칼에 찔려 살해된 채 발견된 비극적 스토리가 있는데, 그의 죽음의 배후가 이혼한 2번째 부인이라는 의혹이 널리 알려졌었다. 펄먼과 구스비의 이날 앙코르 무대 전 이같은 배경을 설명하며 서로 입담 주고받기를 해 관객들을 즐겁게 했다.
펄먼이 구스비에게 레클레어를 잘 모르지 않냐고 묻자, 구스비가 “그 파트너에게 피살된 작곡가 아니냐”며 레클레어의 곡이 “E단조라 해피한 곡은 아니다”라고 응수했다. 그러자 펄먼은 “(곡을 단조로 작곡한 게) 두 번째 부인 때문”이라고 농을 친 뒤, “레클레어는 매우 유명하고 전설과도 같은 작곡가였다. 그의 집에서만”이라고 하더니 “여러분이 레클레어를 잘 모르는 것에 놀랐다. 그는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를 많이 받는데…”라는 능청스러운 농담으로 청중들의 파안대소를 이끌어냈다.
이처럼 웃음이 어우러진 이날 펄먼과 구스비의 무대는, 함께 관람한 음악 칼럼니스트가 다음과 같이 간파한 것처럼, 두 사람의 연주가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마치 그냥 한 사람인 것처럼 완벽하게 들렸고, 스승과 제자 간 따뜻함과 사랑이 넘쳐났다.
“구스비는 그냥 또 하나의 펄만이었다. 두 명의 연주가 아니라 그냥 한 사람의 연주라도 해도 믿을만한 음색과 표현이었다. 바흐가 이렇게 낭만적이었던가. 둘의 연주에는 사랑이 넘쳤다. 다정한 두 연주자의 모습은 마치 할아버지와 손자, 혹은 과거의 펄만과 현재의 펄만이 시공을 초월해 해후한 느낌이었다.”
현존하는 최고의 바이얼리니스트 중 한 명인 펄먼은 말할 것도 없고, 이날 구스비는 정말 눈이 번쩍 뜨이는 새로운 발견이었다. 한국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한국계여서 더욱 애착이 가는 그의 연주를 몇 달 뒤 다시 LA 무대에서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맙게 느껴졌다. 내년 3월30일 디즈니홀에서 LA필과 함께 펼칠 구스비의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콘체르토 협연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