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세 애국지사 이하전 선생 “기독정신이 독립운동 원동력”
▶ 장대현 교회서 예수 알게 돼, 유학 올 때 어머니가 십자가 목걸이 걸어 줘
올해101세의 이하전 선생이 9월 6일 1948년 미국 유학 길에 나설때 어머니가 준 십자가 목걸이를 목에 걸고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하전 선생을 방문한 광복회 회원과 아들 부부 함께 기념 촬영,왼쪽부터 임봉대 목사, 며느리 이은경씨,윤행자 회장,한명해,아들 이인철씨
“아무리 100세 시대라 하지만 오늘까지 이렇게 건강하게 잘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입니다”
일제 강점하 조국 독립운동을 펼친 금강 이하전(李夏田) 선생은 1921년 11월 26일 평안남도 평양출생으로 올해 101세이다. 새크라멘토인근 그래나이트 베이(Granite Bay)의 아들(이인철, Edward Lee.65) 집에 거주하고 있는 이하전 선생은 9월 6일 기자와 광복회 회원들이 집안에 들어서자 자리에서 일어나 환한 미소와 아울러 “먼길을 찾아 주어 고맙다”면서 크게 반가움을 표시했다. 이하전 선생은 100세 넘게 살게 된것에 대해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과 독립유공자로 잘 대우를 해주는 나라와 부모님께 감사한다”고 말했다. 또 옆에 앉아있는 며느리 (이은경, Jennifer Lee)에게도 “잘 돌봐주어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이은경씨는 “시아버님은 잘 듣지 못하지만 아픈데 없이 식사도 잘 하시고 건강하다”면서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면 하루종일 성경과 책을 읽고있다”고 일상을 전했다. 이하전 선생은 그간 살아오면서 한가지 아쉬운 점은 석사까지 하고 박사학위(Ph,D)를 받지 못한것 이라면서 그러나 LA흥사단이 편지에 ‘박사’로 호칭하기에 박사가 아니라하였더니 ‘박사와 다름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광복회 미 서북부지회 윤행자 회장도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3년만에 다시 방문하게 됐는데 이전보다 휠씬 건강이 좋아 보인다”면서 문안 인사를 했다. 이하전 선생은 1995년 상항지역 광복회 초대 회장으로 선임된후 1997년 2대 회장까지 연임했다.
평생 기독교정신으로 살아왔다.
이날 이하전 선생은 한때 목사가 되어볼까하는 생각도 가졌지만 꼭 목사가 돼야 천국에 가는것이 아니라 생각하여 그만두었다고 밝혔다.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예수님 가르침대로 올바르게 살아야 참된 크리스천으로서 자격이 있으며 생활철학임을 강조했다. 그는 어머님의 기도로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어릴때 평양 장대현 교회를 통해 예수를 알게된후 평생을 기독교 정신으로 살아왔다고 말했다. 이러한 기독교 정신이 3년6개월 감옥살이를 하면서까지 독립운동을 하게 한 원동력이 됐으며 남한으로, 미국까지 영적으로 인도했다고 밝혔다. 그는 1948년에 유학을 오지 않고 북한에 그냥 있었다면 공산화 된후 공산당이 많은 기독교인들을 죽였기에 자신도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을 것이라고 가상해보기도 했다.
이하전 선생은 자신의 미국유학은 ‘십자가 목걸이 하나와 떠난 무전 여행”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어머니가 3대독자인 아들이 장가 갈 때를 위해 준비해 두었던 순금반지를 녹여 만들어 유학을 떠날 때 직접 목에 걸어준 십자가 순금목걸이도 공개했다.
십자가 목걸이와 떠난 무전여행
이하전 선생은1948년 9월 25일 미 육군 수송선(General B.Buckner)을 타고 인천항을 출발하여 2주간 항로를 마치고 1948년 10월10일에 샌프란시스코항구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린후 그 날이 마침 일요일이라 상항한인감리교회로 가서 50여명의 교인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10월12일에는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LA로 가서 대한인국민회관과 흥사단 본부를 방문하였다. 이 당시 십자가 목걸이와 5달러 한장만이 지갑에 남아있어 무전 여행같은 모험의 인생항로를 걷게 되었다고 말했다. 흥사단원으로 처음으로 미국에 온 그는 1968년부터 3년간 흥사단 미주위안부 위원장을 맡아 하는등 흥사단원으로 활발하게 활동을 했다.
이하전 선생은 패사디나 칼리지에서 공부후 1951년 봄에 몬트레이로 이주하여 미 육군언어학교 한국어 교수로 30여년간 가르친후 1986년 은퇴했다. 그 후 상항지역 민주평화통일 자문위원과 고문을 역임했으며 2002년 아들이 있는 새크라멘토지역으로 이주를 했다. 이하전 선생은 그 동안 모두 5권의 저서를 펴냈다. 1998년 옥중기 「아담후예들의 나체군무」를 시작으로 2003년 수필집「빛을 따라서」, 2006년 「나그네 인생」, 2008년 수상집「들려온 소리들」, 그리고 2012년「오마니의 콧노래」를 출간했다. 가족으로는 1954년 몬트레이서 결혼한 부인 고인숙씨는 먼저 세상을 떠났다. 현재는 아들 이인철,은경 부부와 하버드대학에서 오는 12월 석사학위를 받는 손자 (이태우. Austin Lee)와 손녀(이혜은, 지은)등과 다복한 가정을 이루어 기쁨과 감사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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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이하전 선생은 ?
한국과 일본서 비밀결사조직 독립운동
일본 유학중 1941년 체포되어 옥고 치뤄
이하전 선생은 한국과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국가보훈처의 공적 조서에 의하면 1936년 평양 숭인상업학교에 재학중 이광수가 지은 ‘흙’, ‘조선의 현재와 장래’등을 탐독하며 민족의식을 함양했다. 정치•경제 등 제부문에서 자행되는 일본인의 차별대우와 억압에서 벗어나 조국독립을 쟁취할 것을 열망하여 항일운동의 방안을 모색했다. 그리하여 1938년 10월 숭인상업학교 학생 오영빈, 김구섭 등과 함께 조국독립을 목적으로 비밀결사 독서회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이들은 같은 해 12월 모임을 갖고 독서회를 축산계로 개칭했으며 이하전의 집이나 공원 등지에서 수차례에 걸쳐 월례회를 개최하고 실력양성과 독립정신 함양을 내용으로 오등의 서사라는 결의문을 작성하여 집회때 마다 암송하며 항일의식을 다져갔다. 그는 1939년 10월 중순 김구섭으로부터 안창호의 복사된 사진을 건네받고 그 위업을 기리며 비밀결사의 운동자금으로 사용할 8달러를 출원하였다. 일본에 유학하여 1941년 1월 동경시 소재 사립법정대학 예과에 재학하고 있으면서도 비밀결사 운동을 계속하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이일로 인하여 1941년 12월 19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한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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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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