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한국영화도 보고 드라마도 보고는 해서 요즘 서울의 모습이 그리 낯설지는 않다. 그럼에도 눈을 감으면, 내 그리운 서울 거리는 여전히 흐린 잿빛의 70년대다. 그곳엔 곳곳에 육교가 있고 또 고가도로가 있다. 삼일고가, 아현고가, 종묘 지나 원남동, 혜화동 로터리.
시골 작은집이 초가에 슬레이트를 올리고, 서울 거리에는 그렇게 하늘에 길을 올려 개발이라 했다. 풍전상가에 처음 들여놓는 에스컬레이터 구경보다 고가도로 타고 돌아오는 길이 더 짜릿했다. 이렇게 빨리 달리다가 난간을 받고 떨어지면 어떡하나 어린 마음에 겁도 나고. 창경원 하니문카 저리가라였다.
고가도로, 고층빌딩, 그 즈음 배웠을 높을 고(高), 영어단어 하이(high)가 그렇게 내 머릿속에 같이 새겨졌나 보다. 이민 와서 한참을 살면서도 하이웨이(highway) 소리를 들으면 고가도로가 떠올랐다. 현대적인 도시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콘크리트 덩어리.
웬걸, 하이웨이는 오래 된 동네에서 더 자주 만난다. 높이 지나가는 고가도로는 오버패스 (overpass), 비교적 근자에 나온 말이고 하이웨이는 오래된 표현임을 한참 지나서야 알았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이 하이웨이다. 그러니까 오래 전에 생긴 국도, 간선도로들이 주로 하이웨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하이웨이라는 이름 자체는 양쪽 도랑의 흙을 퍼올려서 가운데를 높인 로마시대의 가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길을 표현하는 영어단어가 너무 많다. 로드(road), 스트릿(street), 드라이브(drive), 애비뉴(avenue), 레인(lane), 웨이(way), 블러버드 (boulevard), 파크웨이(parkway)... 어떤 차이들이 있는지 대충 감으로 느끼고 넘어가는데 오늘은 하나만 알아본다. 턴파이크(turnpike).
주로 동부에서 쓰는 표현인데 그렇다면 역사가 있다는 뜻이다. 남쪽에서 뉴욕을 가려면 거쳐야 하는 뉴저지 턴파이크, 우리 워싱턴의 코리아타운인 애난데일의 리틀 리버 턴파이크가 그렇게 오래된 길들이다. 서부 사람들은 잘 모른다.
리틀 리버 턴파이크는 셰넌도어 산자락의 농장지대인 알디에서 알렉산드리아 항구까지 수확물을 실어나르기 위해 19세기 초에 닦은 도로다. 나무를 자르고 돌을 캐서 바수어 34마일의 길을 냈다. 1820년대 보수에 들어가면서는 바위를 깬 잔돌로 포장을 했다. 이 공법의 창안자 이름을 따서 매카담(macadam) 도로라고 부른다.
파이크는 끝을 뾰족하게 깎은 나무 막대기다.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요새의 울타리를 쌓고 때로는 죽창처럼 무기로 쓰였다. 턴-파이크는 나무 창으로 엮어 통행을 제지하는 차단기를 옆으로 돌려서 지나가게 한다는 뜻이다.
턴파이크에는 일정 거리마다 통행료(toll)를 받는 톨 하우스(toll house)를 두었다. 1800년대 초중반 통행료로 재원을 충당하던 턴파이크는 미국의 산업발전에 한 몫을 했다. 요즘 닦는 유료도로는 톨 로드, 톨 부스(booth)로 부른다.
길이름, 지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갤로우스 로드(Gallows Road) 때문이다. 한인타운 애난데일과도 연결되고 무엇보다 운전면허, 자동차 등록 때문에 몇 차례를 찾아간 차량국(DMV)이 그 선상에 있어서 잘 아는 길이름이었다. 잘 아는, 그런데 뭔 뜻인지 모르는.
갤로우스가 사형수의 목을 메다는 교수대라는 걸 후배가 가르쳐줬다. 그것도 몰랐느냐 비웃지 마시라. 종합영어에도 나오지 않는 단어를 내가 어떻게 알겠냐. 아하! 하고 생각해 보니 갤로우스 로드는 옛 법원 길, 올드 코트하우스로드랑 연결이 되네. 식민지 초기 그 근방에 법원이 있었고 그랬기에 그 옆에 교수대가 있었던 것이다. 시구문, 새남터 이런 연상이 되더란 말이지.
그 뒤로 길이름에 관심이 생겼고 하나 둘씩 그 사연을 알게 되면서 이 동네에 정을 붙이게 됐다. 글리브 로드(Glebe Road) 하면 폴스 처치 교회의 목사 사택이 있던 곳, 폴스 처치는 그레이트 폴스 폭포가 있는 동네에 세워진 첫 교회에서 연유했고, 그레이트 폴스는 포토맥 강을 거슬러 내륙 탐험에 나선 존 스미스, 예스! 포카혼타스의 바로 그 스미스 선장 앞에 떠억 하니 나타나 배를 돌리게 만든 폭포...
그렇게 길이름을 통해서 학연 혈연 다 떨어진 이 땅에서 그나마 지연을 하나씩 엮어가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정재욱 <전 언론인,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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